''All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Ephesians 5:9)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경제학전공 석사과정 김성진.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은 빌닷의 말을 듣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본문은 빌닷의 말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욥은 자기가 하나님의 정죄를 피할만큼 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빌닷의 말대로 자기 죄가 다른 사람의 죄보다 크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큰 벌을 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9:1,2). 욥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바스와 빌닷이 욥을 정죄하였으나 그 동일한 정죄는 엘리바스에게도, 빌닷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엘리바스와 빌닷의 문제점은 사람의 시각에서 보는 죄와 하나님이 악하게 여기시는 죄가 정확히 같다고 본 것입니다. 다만 욥은 이 둘이 다른 것이요 사람의 의가 하나님께는 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산이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무너뜨리고 옮기실 수 있는 정도입니다. 땅을 움직이시고 땅의 기둥을 흔드실 수 있습니다. 해를 뜨지 못하게 하시고 별을 가두실 수 있습니다. 하늘을 펴고 바다를 밟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별을 만드시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 고백은 욥의 창조신앙을 나타냅니다. 욥은 엘리바스와 빌닷이 아는 하나님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감히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 의를 주장하지 못하고 고통을 받아들이고만 있었습니다. 이것은 욥의 훌륭한 순종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난의 고통이 덜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9:17,18).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9:21). "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9:25).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9:28).

  욥은 하나님이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그 거룩하심의 기준대로 심판하실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9:34,35).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모르는 것을 물을 수 있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욥은 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만이 자기 고통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고 믿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종기를 낫게 해 줄 의사가 충분치 못해서 그가 고통받은 것이 아닙니다. 재물을 잃어버릴 때를 대비한 보험이 없어서 그가 망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들을 위한 안전대책이 부족해서 가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만큼 하나님이 다시 취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욥은 빌닷보다도 죄와 의에 대한 지식이 더 많았습니다. 자기 고통이 하나님이 주신 고통인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남들보다 온전함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더 받을 때, 스스로 죄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나님께 자기를 항변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사람에 대하여 무죄함을 주장하기는 하였습니다.

  욥은 엘리바스나 빌닷을 욕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기를 변호하는 태도는 빌닷과 엘리바스의 논리를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사람과 변론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것이 좋은 태도입니다. 본문의 욥에게서 이것 하나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저의 신앙적 태도의 옳고 그름을 사람의 눈으로 판단 받고 고치고자 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이 많은 인도하심을 주실 수 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의 말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이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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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본문의 요절은 빌닷의 질문입니다. 빌닷은 욥의 태도가 옳지 않다고 정죄하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8:3). 그의 말이 멋있습니다. 그러나 빌닷이 말하는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정의와 공의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빌닷이 생각하는 세상적인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따라서는 굽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빌닷은 욥의 말이 옳지 않고 공의와 정의를 훼손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과 초대 교회 성도들을 핍박한 사울과 같은 태도입니다. 빌닷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청결하고 정직한 자를 돌보시며 의로운 자의 처소를 평안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시작이 미약한 사람이라도 정직하면 나중이 창대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로 보았습니다. 빌닷은 이것을 역사를 통해 배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빌닷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빌닷은 아마 하나님의 심판과 축복이 모두 세상적인 것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지각으로 알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하나님의 축복을 말할 수 있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그런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빌닷의 말에 천국에 대한 약속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성이 없습니다. 단지 기계적인 원리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돌아간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빌닷과 같은 신앙관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을 배우는 첫걸음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는 없습니다.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은혜이지 규칙이 아닙니다. 율법은 복음을 영접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만 율법의 조문이 구원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심판자가 아니라 하늘의 심판자이시며 땅에서 심판과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은 또한 용서의 주님이기도 하십니다. 제가 저의 지각에서 알 수 있는 원리가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주권이 저의 생각보다 큰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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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욥은 이전에는 축복 외에 그의 인생에 다른 것은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고 버림 받은 상황이 오자 인생의 슬픔과 고단함을 이야기합니다. 욥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았습니다. 욥은 자기가 다시는 행복해지는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욥의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된 것이니이다"(7:16).

  이 기도는 전혀 배울만한 것이 못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대단한 사람 욥의 연약함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의 포기하는 말, 그의 불신의 말이 듣는 사람을 가슴 아프게 합니다. 한편으로는 욥이 얼마나 심신의 고통이 심했으면 이와 같은 한탄을 할까 생각해 봅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이론으로만 하나님을 배우는 사람으로써는 감히 이 고통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욥이 한 가지 잘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7:17,18). 이 탄식은 하나님이 욥에게 이루신 일들에 대한 욥의 불만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의 바탕에는 하나님이 욥을 크게 만드시고 하나님이 욥에게 마음을 두시고 하나님이 욥을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신다는 욥의 영적인 지식이 깔려 있습니다.

  욥은 비록 한탄하고 고통을 토로하기만 하였으나, 말씀을 읽는 사람으로서 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셨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땅에서 모든 짐승이 나왔으므로, 사실 사람의 육신은 짐승의 육신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특별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주셔서 사람이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첫 사람에게 동산을 맡기시고 자기 피조물의 이름 짓는 일을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의 교제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죄로 타락한 사람을 회복시키시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생령이 되었으나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함으로 인하여 타락하고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원래 계획하신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로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보여 표적을 삼으셨습니다. 죄인은 이 진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권징과 단련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의 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는 이에 대하여 우리가 이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다고 표현함으로써, 흙으로 만들어진 육신에 하나님의 생기를 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징과 단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권하실 때 자기의 능력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징벌하고 단련하실 때에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운이 나쁜 것을 탓하겠습니까? 이것은 영적으로 아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단련하심으로 인하여 나쁜 것이 나쁜 것인 줄을 배우고 세상보다 하나님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으면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고난 받는 것이 유익이라 했습니다. 저는 당한 큰 고난이 없으나 물질의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학업의 실패도 단련입니다. 역사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는 것도 나름의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의미 없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징과 단련에 의해서 제가 강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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