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Ephesians 5:9)

원천UBF 김성진.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본문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방주에 들어간 바로 그 노아입니다. 성경은 노아를 향하여 의인으로 높이고 칭찬합니다. 그는 온 인류 중 유일하게 경건하여 구원을 얻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라고 해서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 노아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노아의 실수를 세 아들이 목격했는데 그들의 행동은 서로 달랐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실수와 허물을 대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이후 물질 자립을 위해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포도 농사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포도 농사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었으며 동시에 축복이었습니다. 포도 농사의 산출물은 하나님의 것이었으므로, 소득의 얼마를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리고 나머지도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소비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포도를 먹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가공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기술이 있다면 건포도도 만들 수 있고 포도잼도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형태이든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일 수 있다면 그렇게 쓰이는 것이 허용될 뿐만 아니라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9:20,21).

  본문의 노아는 하나님이 방주로 구원하신 바로 그 노아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이 주신 산출을 자기의 정욕을 위해 썼습니다. 그가 포도 열매로 만든 것은 포도주였습니다. 물론 포도주가 가지고 있는 장점도 있겠지만, 본문에서 드러나듯이 술은 사람을 쾌락의 종이 되게 만듭니다. 술을 마시는 문화가 우리 나라는 특히 심한데, 멀쩡한 정신으로는 교제할 수 없고 술을 마셔야만 교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쾌락 속의 교제를 원하는 것입니다. 술은 사람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사람을 실수하게 만들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큰 적입니다. 비록 취하지 않더라도 술과 술자리에 의지하는 시간은 의미있는 시간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노아의 포도주도 육신의 쾌락을 위해 쓰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술을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습니다. 자기 집에서 벌거벗은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장성한 아들들과 그들의 온 가족이 함께 있는 집에서 대가족의 가장이 하기에 합당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의로운 사람이라도 본질적으로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죄인인 이상 때로는 실수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러한 사람이라도 다 죽이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방주에 들어갈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제가 죄인이고 부족한 자이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때마다 말씀 생활 멈추기를 잘 하고 세상의 재미를 찾아 나서기를 잘 하지만 주님의 피의 공로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나아가서 실수와 실패의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회개하는 삶을 산다면,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2)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아의 실수와 허물을 목격한 자가 있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들이었습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9:22,3). 본문에서 드러나듯이 세 아들의 처신은 달랐습니다.

  함은 자기 아버지의 허물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보았을 때 아들은 어떻게 해야 옳습니까? 자기 형제와 함께 아버지의 흉을 보는 것이 옳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허물을 가리고 아버지와 함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물론 자기 형제들도 사실을 알아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자신이 아버지의 허물에 대해 이해를 하고 용서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많으시지만 완벽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흉을 꼬투리 잡고 '내 부모는 부족하다' 하고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육신의 부모는 나름대로 완벽하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남들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남들보다 나은 자녀를 길러내고자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센터의 목자님들도 완벽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죄인으로서 이를 정죄하기보다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남의 허물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고 흉을 볼 것이 아니라 먼저 그를 이해하고 덮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일어나자 자기가 행한 일과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아는 세 아들에게 각기 합당한 축복을 주었습니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9:25-27).

  아버지의 허물을 보고 아버지를 깎아내리는 데 사용했던 함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은 하나님을 소유한 민족이 되고 가나안을 종으로 두게 되었습니다. 셈과 야벳은 주님의 구속역사를 가까이서 목격하는 민족으로 발전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일을 한 사람에게 합당한 축복을 주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결국에는 심판을 받게 하시는 공평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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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본문은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이후의 사람들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같기 때문에, 노아가 받은 축복도 모든 사람이 받은 축복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 이것은 하나님의 첫 사람에게 주신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범죄한 죄인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축복을 주고자 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만 감사하고 회개함으로 죄 씻음의 은혜를 더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들에게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피째 먹지는 못하게 하셨습니다. 피는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노아 이후의 사람들이 비록 가축을 식용으로 쓰더라도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이 율법으로 인해 우리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신 이로 부르는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율법의 형태는 때마다 바뀔 수 있고 그 조문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나, 여기에 흐르는 은혜와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아들들과 다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 언약 또한 모든 인류에게 동일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9:11). 노아 이후에도 인류는 언제나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수 심판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번의 심판이지만 모든 사람이 기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홍수 심판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의 심판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미워서 홍수를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심판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언약의 증표는 무지개입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9:13). 왜 하필 무지개입니까? 홍수 이전에는 비가 없었으므로 무지개가 없었기 때문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하필 무지개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의 증표를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겠다는 약속의 확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약속을 하시고 더 신실히 지키시는 것도 모자라서 다시 확인까지 하셨습니다.

  약속의 증표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얻은 아들 이삭도 약속의 증표입니다. 그의 아들 노총각 이삭에게는 아름다운 아내 리브가가 약속의 증표였을 것 같습니다. 모세가 든 놋뱀도 약속의 증표입니다. 성경 시대가 아니더라도 지금을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각자 받은 약속의 증표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마음에 새겨진 받은 증거가 많고, 실제적으로 훈련과 축복을 통해 얻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물질 문제를 날마다 헤쳐 나온 것이 증거가 되고, 학업을 감당하는 것이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성도가 인지해야 할 가장 큰 증표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예수님 스스로도 가장 큰 표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죄인이 죄 씻음을 받고 거룩한 부활의 육체를 입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최종적인 변화입니다. 받은 증표가 있으면 그 언약을 믿어야 합니다. 제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루고 언약을 믿고 날마다 확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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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본문은 홍수와 홍수 이후의 가장 최초에 대한 기록입니다. 노아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고 그 안에 거하였으므로 생명을 보존하고 역사를 이어가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노아에게 영원히 불편한 방주에 거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원하시는 심판의 역사를 이루신 후에 노아에게 땅을 주셨습니다. 노아가 까마귀며 비둘기들을 날려보다가 물이 줄고 뭍이 드러나는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날수가 차자 방주가 땅에 닿고 지면에서 물이 걷혔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나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8:16,17). 노아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나왔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8:20).

  노아가 가장 처음 한 일은 정결한 짐승과 새를 취하여 제사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 중에 노아 홀로 남았으므로 그는 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집도 새로 짓고 경작할 땅도 찾아야 했습니다. 홍수로 인해 바뀐 주변 환경이 노아의 삶을 혼란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한 일 중에 오늘 본문에 기록된 것은 그가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 뿐입니다.

  세상은 시시각각 바뀌기 때문에 성도의 삶도 따라서 시시각각 바뀌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의 중심까지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바빠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내일이나 모레나 언제든 바빠지면 그 때마다 예배를 포기할 사람입니다. 사도는 모든 신자를 보고 자기를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기 환경에 따라 예배를 포기하는 삶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대학원 연수는 2년으로 짧고 그 중에서 한 해가 이미 지났습니다. 앞으로 한 해가 지나면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마음의 분주함을 이유로 예배 드리기를 게을리 하면 안 되겠습니다. 세상이 다 바뀌어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내일까지 동일하신 대제사장이신 것을 기억할 때, 저도 또한 제사장의 직무를 맡은 자로서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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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노아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직접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75세의 할아버지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바로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75세의 나이에 친지와 고향을 모두 떠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아브라함, 당시 아브람에겐 아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그대로 영접하고 주께서 자신에게 복 주신 줄 믿고 아내의 고생도 보답받을 줄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라 상급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출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렵지 않다면 그것은 생각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계획이 불확실하지 않은 일에 도전하지 않는 것은 이미 사람의 본능과도 같습니다. 제한된 시간과 물질적 조건 안에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과 물질을 들여 도전한 일에 실패하는 것의 타격은 우리에게 크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고등학생들은 재수를 하지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됩니다. 대학생들은 시간을 아껴 공부해야 하지만, 대개 그렇지 않아서 역시 후회하게 됩니다. 만약 제가 계획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실패하게 되면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지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든 두려움을 뒤로하고 떠나라는 그대로 떠났습니다. 저도 제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니의 가라고 하는 그 땅을 자신에게 주신 땅인 줄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약속하신 그 땅에서 헷 족속의 시민권을 구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헷 족속은 그 땅에서 오래 산 아브라함을 존중하여 아브라함에게 매장지를 주고자 하였으나 아브라함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렇게 밝힙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창 23:4). 아브라함은 이 말을 철회하지 않고 굳이 대가를 치르고 매장지를 사고자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하신 땅에서 자신으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한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창 12:1~2) 히브리서 기자는 이에 대하여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1:1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이삭을 낳았을 때는 90세였습니다. 여성은 때가 되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되지만, 사라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자연법칙을 뛰어넘어 잉태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사자가 기한이 이르면 잉태할 것이라고 하였을 때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이렇습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그러므로 사라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경외하고 믿는 마음으로 기한을 기다렸기 때문에 이삭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11:12)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살아있을 때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큰 민족의 우두머리가 되어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기근이 들었을 때 견디기 어려워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가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히브리서는 이에 관하여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11:13, All these people were still living by faith when they died. ; NIV)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번제하라는 명령도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은 이삭을 바치려 했을 때가 처음이 아닙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아브라함이 처음에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때 그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을 믿고 죽을 때까지 실현되지 않은 약속이었으나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사람은 본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도 자신이 사는 곳에 애착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새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11:15~16). 우리에겐 우리의 더 나은 본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11:13)할 수 있습니다. 제가 세상보다 하나님 나라를 더 나은 것으로 믿을 때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저를 위해 "한 성을 예비"(11:16)하십니다.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에게 예비된 처소가 있고 부활이 있습니다.
 

제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더하시는 능력 있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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