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Ephesians 5:9)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경제학전공 석사과정 김성진.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의 첫 모습들을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광야에서 이기신 후에 비로소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일 하기에 급급한 우리 사람들과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교회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루신 일을 인정해야지 필요한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또한 겸손하게 하나님을 앞서나가지 않으시고 순서대로 일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대단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 작은 일들이 위대한 구속역사의 중심이었습니다.

  요한은 권력자의 부정을 규탄하다 체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소식을 듣고 갈릴리로 물러나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야곱의 아들들 중에 있었지만 나중에 북이스라엘에 포함되어 신앙의 순수성을 많이 잃었고, 예수님 시대에도 정통 유대주의적 문화에서 가장 먼 유대 땅이었습니다. 가장 말씀과 가까우신 분이 가장 말씀과 먼 지역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4:14-16).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영감으로 선지자의 말씀을 다시 보았을 때 선지자의 말씀이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스불론, 납달리, 요단 강 저편, 갈릴리는 모두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들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에게 주신 빛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주신 빛에 대해 기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4:17). 예수님은 회개와 천국의 빛을 주셨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로, 아무 고통도 없이 영원한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시기와 미움이 없고 사람들 간의 다툼이 없으며 갈등이 없고 죽음의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또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수만 명이 모이는 대 부흥 집회를 여신 것이 아니고 열두 명의 제자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집중적으로 도우셨습니다. 본문에서는 그 중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4:18). 베드로와 안드레는 어부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달랐습니까?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배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4:21). 역시 어부였습니다.

  어촌이었기 때문에 어부밖에 없는 것이 당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말씀을 전할 만한 권세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어부들을 부르셨습니까? 어부는 신학대학원을 나와서 다른 교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도 아니고 돈이 많이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성이 뛰어나서 말씀을 잘 이해하기를 하겠습니까? 감성이 풍부해서 말씀 앞에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겠습니까? 거친 어부의 삶은 신앙과 잘 안 맞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평범한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와 요단 저편과 갈릴리는 단지 지역적인 면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은 빛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 사람들을 부르신 것을 볼 때에 누구에게라도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부들에게 소망을 두시고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4:19). 이 말을 들은 어부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베드로와 안드레는 바다에 던지던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기우던 그물 뿐만 아니라 배도 버리고 같이 일 하던 아버지를 뒤에 남겨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어부라 그물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낚는 삶을 살 때에 매일같이 그물을 던져도 늘 피곤하였습니다. 죽지 못해 일 하는 삶에 지쳐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소망을 영접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물이 없어도 주님이 주시는 만나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셨습니다. 거기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곳은 갈릴리 작은 동네였으나 온 수리아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모든 병자가 찾아왔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까지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사실에 크게 주목합니다. 말씀을 가르치신 것도 천국 복음을 증거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백성 중에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신 것도 치료의 광선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천국 복음을 얻도록 하시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천국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진 승리의 소식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승리가 이루어졌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펼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멸시 받는 스불론과 납달리 땅을 갑자기 부자 동네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못 사는 동네에 특목고나 자사고가 생겨서 인기를 끄는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를 압제하는 로마를 무너뜨리는 군대를 조직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참 작아보이고 소시민적인 일 같아 보입니다. 뭔가 더 큰 일, 뭔가 더 사회에 참여하는 일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 뿐입니다.

  제가 일용할 양식 말씀을 묵상하고 매주 소감을 쓰고 또 전도를 하는 것은 작은 일로 보입니다. 실제로 무슨 큰 열매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먼저 제가 천국 복음을 잘 알고 또 전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작아 보이지만 오히려 큰 일이고, 세계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성급하여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실망하기 쉽지만, 하나님이 저의 죄를 오래 참으시는 것을 생각하면 제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순종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제가 당장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일, 또 센터에서의 눈에 보이는 역사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주님이 이루시는 일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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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아 물러가라


  본문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을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마귀의 모든 능력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마귀의 시험에 직면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느 죄인들과 달리 이 시험을 떨치고 승리하셨습니다. 후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우리와 동일하게 시험을 받으셨으나 우리와 다르게 죄는 없으시다고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빠져드는 것이 아니지만,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은 구속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성령께서 이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십일 밤낮을 금식하셨습니다. 이 때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첫째 시험이 무엇입니까?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4:3).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큰 시험이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표적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많은 표적을 행하셨는데 모든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을 떡으로 만드는 표적을 행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은 자기 능력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을 증거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뜻대로 표적을 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돌을 떡덩이로 만듦으로써 주린 배를 채우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모든 사람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연약했습니다. 굶으면 배가고팠고 잠을 자지 않으면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말씀을 많이 전하시면 피곤했습니다. 걷다가 피곤하면 우물가에 주저앉아 쉬셔야 했습니다. 매를 맞으면 피가 났고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돌을 떡덩이로 만드실 능력이 있으니 이제 금식을 끝내실 때도 되었겠다 마귀의 창조적인 제안을 받아들여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기를 위해 쓰는 것도 안 좋은 일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거룩한 것이므로 거룩한 곳에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써야 하고 양들을 돕는데 써야지 자기 정욕을 위해 쓰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 먹을 것이 필요하면 주님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거룩한 목적으로 주신 능력을 자기 육신을 위해 바꾸어 쓰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같은 능력을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오천 명을 먹이는 데에는 쓰셨지만 자기 육신을 만족시키는 데에는 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4).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율법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떡으로도 살아야 되지만 그 외에 필수적인 요소가 더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시험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고 우리는 시험 이기기가 불가능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연약한 사람의 육신을 입으시고 마귀의 첫째 시험을 이기신 것은 역시 연약한 육신을 입은 사람들에게 소망이 됩니다.

  마귀의 둘째 시험은 무엇입니까?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4:5,6) 이것은 어떤 점에서 시험이 됩니까? 역시 이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으나 이는 극히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알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두번째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7). 예수님은 역시 말씀에 기초하여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 광야에서 지낼 때에 목이 말라도 물을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자기에게 물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면 살아 계신 것으로 믿겠다는 교만한 생각이었습니다.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지만, 표적을 증거로 삼겠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죄 사함을 받고 천국 복음을 듣는 것은 표적으로 되지 않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됩니다.

  전도를 하다 보면 표적을 보여 주어야 하나님을 믿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형체를 보면 하나님을 살아 계신 것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을 배우는 증거는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봄으로써 믿는 것이 순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정하신 질서는 믿음으로써 보는 것입니다. 양들이 저에게 증거를 요구할 때 저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전해줄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믿음의 증거를 받기 위해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야 되기 때문입니다. 욥기에서 욥이 고백하기를 과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다가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을 들으니 이제는 하나님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체를 보아야겠다는 교만한 사람들의 말을 하나님이 바꾸어 주셔셔 욥에게 주신 축복대로 그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마귀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4:8,9). 거룩하신 예수님께 이것은 극히 초보적인 시험이었습니다. 앞의 두 시험에 비하면 예수님께는 이것은 시험도 아닙니다. 본성적으로 불가피한 것도 아니요, 신앙적으로 교묘한 시험도 아닙니다. 이론적으로는 웬만한 신자들도 속지 않을 만한 시험입니다. 세상 권세를 위해 하나님을 배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말씀에 의지하여 이기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4:10).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겨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정답을 내기 쉬운 유혹이지만, 실제적으로 사람들은 이 유혹에 많이 빠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기 때문에 세상 나라를 섬깁니다. 회사에서 출세하면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의 권세를 잡으면 자기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영광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썩어 없어질 것을 경배하다가 인생을 낭비합니다.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도 결국 땅에서 살기 때문에 세상의 것에 대한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저도 공부를 제 욕심대로 잘 하고 싶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잊을 때가 있습니다. 물질이 없을 때에 물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텐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근심과 염려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은 잠시 물러가시라 하고 돈을 섬겨야겠다고 여길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상 주시는 것을 신뢰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마귀는 시험을 모두 이기신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예수님을 수종들었습니다. 천사가 수종들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말대로 표적으로써 자신을 높이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을 높여주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을 통해 은혜를 받고 소망을 얻습니다. 저에게 당한 유혹과 시험이 있는 것은 저보다 앞서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이겨낼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시험을 이기는 사람의 본이 되셨습니다. 제가 말씀을 안에 담은 질그릇으로서 깨지기 쉽지만 이길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기도로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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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은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세례의 주인이신데, 이 사건은 뭔가 잘못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세례받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기셨습니다.

  요한이 한창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 때에 예수님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한 번을 받으시기 위해 갈릴리에서 요단까지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 할 때에 요한이 말렸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3:14). 요한은 겸손한 사람으로써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한 것입니다. 누가 세례의 주인인 예수님께 세례를 줄 수 있습니까? 누가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 죄 사함을 선포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3:15). 예수님은 자신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길이라고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어떻게 의를 이루는 길입니까?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의의 질서를 뒤집는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죄인들이나 할만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물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에 입교할 때 주로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그만큼 낮추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같은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나중에 세리와 창녀와 여러 죄인들과 함께 식사 교제를 하시며 그들의 문제를 이해하시고 그들이 문제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인 죄 문제를 정확히 찔러 치료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몸 위에 죄를 정하심으로써 우리 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순종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3:16,17).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땅에 오셨으므로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가 되게 되었습니다.

  가장 의로우시면서 죄인의 위치에 서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제가 저의 작은 의를 가지고 자랑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도 최근에 좀 늘었다고 해서 죄인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나 단지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빚진 자입니다. 제가 겸손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며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에 모두 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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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본문은 세례자 요한이 전한 말씀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할 선지자로서 선택된 사람입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3:3). 요한은 옛 선지자가 말한 메시야의 선지자, 다시 올 엘리야입니다. 요한이 맡은 일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미리 사람들의 마음을 예비하고 그들이 회개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갖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요한의 삶과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 하였으니"(3:1,2). 요한은 광야에서 전파했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하고 사역을 했던 곳은 편한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잘 준비된 단상이 없는 광야에서 그는 돌 위에라도 올라가 말씀을 전했습니다. 요한의 사역은 화려한 문화적 중심과 거리가 멀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역사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는다고 여겼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 천국이 가까웠으므로 급히 회개할 때입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살았습니다. 제대로 된 천으로 된 옷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제대로 된 옷을 입을 여유도 형편도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의 음식도 메뚜기와 석청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물질적으로 궁핍하게 산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단 엘리야로 온 자기 사명에 의한 것입니다. 그가 낙타 털 옷을 입고 광야에서 지낸 것은 과거 디셉 사람 엘리야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비록 외모에 불과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에 정통한 사람들에게는 요한의 모습을 통해 다시 온 엘리야를 생각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요한은 사명에 전념하여 세상의 것을  챙기려는 생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전의 높은 자리가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좋은 옷과 먹을 것이 요한을 행복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높은 지위와 명예도 요한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사는 것이 요한의 삶을 천국의 시민권자의 삶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초라하고 괴이한 겉모습을 한 세례 요한에게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3:6). 요한은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컸습니다. 세상 일을 섬기는 자는 세상의 것을 받고 최후에는 멸망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받을 뿐만 아니라 더 풍성이 받을 것입니다.

  제가 역사를 섬기는 데 열매가 없어 보이는 것은 문화나 시대나 외적인 환경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제 내면에 열매가 없다면 세상의 것을 하나님의 것보다 마음에 많이 두기 때문입니다. 외적으로 전도의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여러 가지 외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역시 하나님께 기도하고 회개하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세례자와 같이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하는 삶을 살았는가? 세상에서 실제적인 일을 할 때에라도 주의 영광을 위해 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닌가? 양들을 도울 때에도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지 않는가? 전도를 할 때에도 자기 열매를 주장하지 않는가? 그러면 낙타털 옷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을 정도로 세상으로부터 독립적이었던 세례 요한과 자신을 비교할 때 저는 할 말이 없어집니다. 제가 하나님을 세상보다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위로 받고 하나님께 능력을 얻고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례 요한에게 온 사람들 중에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는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 마음 속에 회개를 어렵게 만드는 장벽이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3:7-10).

  그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특별히 회개하고 특별히 가난한 마음으로 복음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손이었고 문화적으로 유대 문화권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구원 받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은 구원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물론 좋은 신앙 교육을 받고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았다면 회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죄인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다가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이는 아버지가 좋은 신앙인인 사람, 어머니가 교회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엄마의 그리스도는 아무 소용이 없고, 나의 그리스도가 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심판이 가까웠으므로 회개하고 좋은 회개의 열매를 맺어 구원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은 이어서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에 대해 전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1,12).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요한의 물 세례가 비록 도움이 되긴 하지만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세례를 받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를 갈망해야 합니다. 요한이 회개를 전파하며 많은 사람을 이끄는 능력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능력이 많으십니다. 요한 같은 위대한 자도 예수님의 신을 드는 것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논밭의 주인과 같이, 타작 마당에서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심판의 권세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내용과 겉모습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심판을 진행하시는 데 있어서 착오가 없습니다. 알곡은 회개의 열매를 맺은 자를 말하고, 쭉정이는 외양은 있으나 내용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하고 힘이 없고 종교적인 지위가 없어도 세례 요한의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을 정도로 마음이 부드럽고 예수님의 세례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결국 성령 세례를 받고 알곡이 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처럼 지위도 있고 종교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이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겉모습만 그럴듯한 쭉정이가 되어 버려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미 심판을 면제받은 자라 하더라도, 외모보다 중심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외모를 보고 신앙 생활 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심판의 기준을 겉모습이 아니라 내용으로 정하셨습니다. 제가 겉모습을 화려하게 하는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올해 매일 꾸준히 양식 말씀을 묵상하기로 하였으나 이것이 외모와 횟수 채우기에 집착하는 말씀 묵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매일 적은 시간이 될지라도 실질적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어 내용 있는 일용할 양식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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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 후의 일을 이야기합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려 말했습니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2:13). 요셉은 아기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의 보호자 역할을 충실히 한 훌륭한 아버지였습니다. 요셉은 천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밤에 즉시 깨어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헤롯은 박사들이 한참을 돌아오지 않자 자기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심히 노하였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습니다. 헤롯의 잔혹함이 어떠합니까? 또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왕의 권세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아무리 허수아비 왕이라 하여도 세상 권세도 이처럼 무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죽음의 권세라 할지라도 아기 예수님을 해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 바로는 히브리인의 모든 사내 아이를 죽이라 하였으나 모세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이도 하나님이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같이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천사가 다시 요셉에게 말하였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2:20). 모세가 애굽에서 살다 광야로 나간 후 다시 애굽으로 돌아왔듯이, 예수님도 이스라엘 땅에 계시다 애굽으로 피신한 후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곳은 어디입니까?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는 했는데, 아켈라오 헤롯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꿈에 지시히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갔습니다.

  나사렛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천대 받는 땅이었습니다. 이곳은 변방었고 예루살렘으로부터는 사마리아보다도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순수성이 많이 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지 않는다는 지역차별주의적 생각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나사렛에 가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낮은 곳에 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도 구유로, 그리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하필이면 나사렛에 가셨습니다. 이방인들도 많이 도우셨고 사마리아 사람도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적 의나 인간적 뛰어남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피하는 창기와 세리와 죄인들을 모아놓고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을 보면, 저도 인간적인 약점과 허물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또 인간적인 의가 많아서 예수님을 더 잘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도 잘 다가가는 목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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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본문은 어제에 이어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헤롯 왕 때에 나셨습니다. 헤롯 왕은 원래 이방의 이두매 출신으로서, 유대의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힘을 등에 없고 정통성이 없는 왕이 되었습니다. 헤롯은 여기에 컴플렉스가 있었는지, 자기 왕의 자리를 지키고자 굉장히 애를 썼습니다. 아내와 아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을 정적으로 의심하고 죽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폭군 아래에서 고통하였고 헤롯을 무서워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 예수님이 나셨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인 있었습니다. 그들은 멀리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 온 것이었습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은 왕의 중요한 신하로써 학문에 매진하고 왕에게 중요한 조언을 해 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들은 지위도 높았고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막과 광야를 건너 먼 길을 지나 예루살렘까지 이른 것입니까?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 왔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2:2).

  이 소식을 듣고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습니다. 헤롯 왕은 자기 말고 다른 이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났다 하니 놀라고 화가 났을 것입니다. 헤롯 왕 편에 서 있던 사람들은 헤롯 왕의 신하로서 헤롯이 시키는 대로 이리 저리 소동해야 했습니다. 헤롯 왕을 미워하던 사람들은 또 다른 이유로 소동하며 헤롯 왕이 어떻게 망하나 궁금해 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후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실 때에도 자신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음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유대인의 왕이라 쓰인 팻말을 달아 붙였지만, 사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참 명패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헤롯 왕과 같은 왕으로 오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세상 권세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헤롯 왕과 세상의 싸움을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를 치지도 않으셨고 로마 황제를 물리치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왕좌도 두지 않으셨고 군대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려고 오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평화의 왕, 겸손의 왕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싸움을 싸우는 대신에 죄와 싸우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메시야의 별이 아기 예수님이 계신 곳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의 별을 다시 발견하고는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안락함과 부유함과 명예와 권력을 뒤로 하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 본문의 박사들을 볼 때, 세상의 여러 가지 가치가 우리를 화려하게 꾸며줄 수 있더라도 내면에 참된 경배의 대상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자기 집 창고에 쌓아 놓고 있을 때 아무런 감동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도둑이 들까 걱정하여 경비를 세우고, 또 경비가 도둑질을 할까 두려워 다른 경비를 세우는 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경배하고 그들이 가진 소중한 것의 일부를 내어 드릴 때 참된 기쁨이 있었습니다. 메시야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죄에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박사들도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 편안하고 상식적인 것에서 벗어나 메시야의 별을 따르고자 할 때 참된 경배의 대상을 찾고 행복을 얻었습니다.

  제가 석사 세번째 학기에 들어가고 아직 아무런 장래 방향도 결정되지 않아 불안하기 쉬운 시기에 있습니다. 군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아무런 앞일도 스스로 예측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근심과 염려를 마음에 채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걱정만 해봐야 무슨 길이 나오겠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와 지혜로 길을 찾는 것이 단연 옳습니다. 학생 시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영적인 성장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지 않으실 길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세상의 것을 찾기 위해 걱정하는 것보다 메시야를 찾기에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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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라 하는 사람이었고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 나타났더니"(1:18).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으나 요셉은 이것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마리아와 결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즉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 마리아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 하지 않고, 복수하고자 하는 미움의 감정을 버리고 조용히 이 관계를 끝내고자 했습니다. 첫째로는 율법을 지켜 마리아와의 결혼을 깬 것이고, 둘째로는 자기에게 큰 상처를 입힌 사건이었음에도 여자를 지켜주고자 하는 요셉의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마리아에게는 위기였습니다. 마리아는 부정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 주의 사자가 마리아와 요셉을 도왔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1:20,21).

  마리아와 요셉이 키우게 될 아이는 어떤 아이입니까? 성경은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라고 기록합니다. 모든 것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1:22,23).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이미 임마누엘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과거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이 죄를 지어 이민족의 침략 앞에서 무너짐을 경험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회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 유대인들은 그 땅을 회복한 듯 보였으나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영적으로 죄의 세력에서 독립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소망의 약속을 주시고 예수님을 통해 이를 이루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이름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저는 분별력 없는 죄인이라 하나님과의 거리가 한 없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제가 경외해야할 대상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피해다닐 만한 핑계거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적극적으로 찾아오시고 저와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문제 되는 점을 찾아 해결받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제 안에 있는 불안과 염려는 제가 이 부분에서 하나님을 잘 인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안에 있는 한계의식도 제가 이 부분에서 하나님을 잘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저와 함께 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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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복음은 사도 마태가 예수님의 삶을 알리기 위해 기록한 책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가 잘 드러나 있는 책이며, 약속된 메시야로서 오신 예수님을 구약 예언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 전하는 데에 적합했던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첫부분의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족보를 통해서 유대인들이 알고 있던 그들의 왕조와 예수님의 연결성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족보는 다윗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암시합니다.

  족보에는 특기할 만한 여인들이 나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1:3),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1:5),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1:6). 여기까지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가 족보에 기록된 여성의 전부입니다. 당시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를 이었기 때문에 족보가 특별히 중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여성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네 여인의 이름은 왜 기록된 것입니까? 그들이 특별하게 거룩한 삶을 산 위인이기 때문입니까?

  사실 이 네 명의 사람들은 유대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마태는 이 이름들이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가리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이름들은 죄인을 불러 세우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다말은 자기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은 사람입니다. 라합은 이방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리고의 기생이었습니다. 룻 또한 이방인이었고 그는 보아스와는 초혼이 아니라 재혼으로 결합한 것이었습니다. 밧세바는 이미 남편이 있는 상태에서 다윗과 동침했고 그래서 낳은 첫 아이를 잃은 후에야 솔로몬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한국인의 관점에서 봐도 이 여인들은 자랑하고 싶은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께 이르는 족보라 하여 거룩하고 순결한 이름만을 적으시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정직한 왕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죄인으로 보이는 여성들의 이름이 동일한 가치를 두고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역사에서 쫓겨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고자 하면 그의 신분이 기생이나 이방인이나 죄인이라도 하나님은 받아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죄의식과 운명의식과 한계의식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막는 이유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은 안 될 것 같다든지, 포기해야겠다든지 하는 생각들이 하나님의 영을 적극적으로 찾지 못하게 만듭니다. 지은 죄가 있다고 하나님 찾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어리고 부족하여 죄가 많으나 회개하고 돌아갈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주시고 축복을 주시는 것을 생각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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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오늘 말씀은 부활의 말씀입니다. 모든 복음서는 부활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마다 기록하고 중점을 두고 있는 사건들이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부활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이것은 부활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믿는 사람의 기본적인 가장 중요한 소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안식일 동안은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 두 여인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무덤을 찾아오면서, 당시 무덤의 입구는 큰 돌로 막혀있었으므로 이것을 어떻게 치울 것인지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덤의 광경은 이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큰 지진이 나면서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 놓고 돌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의 모습은 번개 같이 위엄 있게 빛나며 그 옷은 정결하고 거룩하였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자들도 모두 이것을 보고 있었으므로 무서워하였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사람들은 아마 삯을 받고 평범하게 무덤을 지키다가 가면 되는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앞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적이 있으므로 이들은 놀라서 거의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천사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28:5~6). 각 복음서마다 천사의 전한 메시지가 조금씩 다르므로, 아마 천사는 생각보다 장문의 메시지를 전한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다른 복음서의 대칭구절들과 비교해서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몇번이나 자신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람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 계신다는 것도 말씀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전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26:32). 제자들과 사람들은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이것을 잘 알지 못하였으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지식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십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이것을 보고서야 믿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약속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으로써 약속하신 가장 큰 표적입니다. 이 부활을 위하여 초대 교회의 많은 사람이 육신의 목숨을 잃은 것은 다 이 부활을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소망이 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부활이 소망이 되는 이유는, 부활이란 것은 예수님만 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경외할 뿐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죽음을 주로 "잔다"라고 많이 표현하셨는데, 이것은 믿는 사람들은 무덤 가운데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가장 중요한 소망인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방향은 하나님께로인데 자꾸 세상의 것으로 옮겨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학업성적 문제나 기타 다른 문제 때문에 고민할 때가 있는데 때로는 이것이 마치 인생의 본질인 것 마냥 매달릴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회개하여 영원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음을 감사하고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러 갈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고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28:9~10). 예수 부활의 첫째 증인은 여인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에서 여인의 증언은 온전한 효력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믿음의 여인들을 먼저 최초의 부활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이 앞에서 인간적인 편견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인정 받지 못하던 여인들을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 예수님께 올만큼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주님께서는 외모보다 중심을 보십니다.

  천사가 나타남을 본 것은 여자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무덤 문을 지키던 파수꾼들도 이것을 보고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은 무엇을 보았겠습니까? 본문에 기초해볼 때, 지진과 무덤문이 열린 것과 천사를 보았을 것입니다. 천사의 부활 메시지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에게 그대로 전하였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이제 사람이 지키려던 무덤 문이 열리고 천사가 내려옴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이 확실시 되고 있습니다. 이 때에 대제사장들은 회개하여야 했습니다. 회개하여야 한다는 것은 뻔한 메시지이지만, 이 때가 대제사장들이 회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회였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던 표적에 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가장 확실한 표적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28:12~13).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대적자였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였는지, 혹은 아직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채로 자신들이 위대한 선지자 하나를 죽
였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쪽이든 이를 용서받으려 하기보다 숨기려 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숨길 수 있어도 하나님께는 감출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숨기고 싶은 것은 사람의 본성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고 싶고, 그럴 때에는 자신의 허물과 죄를 숨기는 것이 유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계에는 진실함이 없습니다. 죄를 들어내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혹여 사람 사이에 숨김이 있다 해도 하나님께는 드러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없는데 하나님께 자신을 감추려 해서는 안 됩니다. 참 자아를 드러내어 치료받아야 합니다. 제가 저의 잘못을 정당화하여 마치 죄 없는 사람인양 교만하지 않도록 겸손한 마음을 얻고 지키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실입니다. 주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약속하신 대로 제자들을 만나시고 마태복음의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18~20).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처음부터 창조주 하나님과 같
은 하나님으로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또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말씀에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큰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 안에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으므로 이 권세의 주인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도우시기 위해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이 가시고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마음속의 그리스도의 자리를 지키심으로 함께 계십니다.
 

제가 약속대로 살아나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며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삶의 능력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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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료해주시는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중풍병자 치고는 꽤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위하여 침상을 짊어지고 예수님께로까지 데려가 줄 만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어쩔 수 없는 중풍병자였으므로, 그는 외출을 해서까지 침상에 누워 있어야 한다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9:2). 예수님의 죄 사함의 권세는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고 펼쳐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오면 나을 수 있는 믿음은 넘치게 축복받습니다. 처음 기대했던 나음보다 더 큰 나음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치료의 광선 안에서 치료받게 됩니다.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은 병자의 중풍병을 낫게 하기 위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를 넘치게 축복하셔서 오히려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중풍병자의 가장 큰 문제는 중풍병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중풍병의 문제를 다루기 이전에 죄의 문제를 먼저 보셨습니다.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중풍병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였습니다. 중풍병자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의 외적인 조건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람은 중풍병으로 좌절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중풍병을 문제삼는 자신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개척정신과 도전정신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가득차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자신의 외적 조건에 좌절하여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내가 중풍병에 걸려 누워 있지만 나의 삶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하겠다'라는 의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외적 조건을 쫓아다니며 그것이 이루어지면 자신의 삶이 풍요로워질 것을 기대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탓에 내 인생은 별 볼 일 없고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 중풍병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먼저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중풍병자는 이것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자신의 중풍병이 모든 불행의 근원이라고 여겼습니다. 물론 중풍병은 불행한 병입니다.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풍병자라도 하나님과의 교제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9:2). 중풍병자는 이 죄 사함을 통하여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비록 중풍병이 낫지 않더라도 자신의 인생문제의 보다 근본적인 해결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운명주의와 한계주의의 덫이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큰 돈을 벌어서 빌 게이츠보다 더 큰 부자가 되고자 하였는데, 시대와 능력의 한계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는 좌절하였습니다. 제 동생은 처음에 대학에 진학할 때 4년제 대학에 편입하여 대학원을 가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는데,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고 열정이 없음을 깨닫고 학점은 3점을 넘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임훈희 형제님은 영원히 살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는 예전에 생명공학이나 생명과학을 전공하고 싶어 했는데 집안의 반대로 그 길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현대과학으로 사람에게 영생을 줄 수 없다는 한계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주님의 뜻이 있다면 모든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루어집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구속역사의 출발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삶에는 눈에 보이는 열매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한 아들 이삭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지금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볼 때, 하나님의 한 사람을 통한 역사는 시대와 공간을 관통하여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일어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의심하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이 죄 사함의 권세를 신성모독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이 사람들은 지극히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죄를 사해 주시는 권세는 하나님밖에 가지고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앞에 있는 예수님이 예언의 메시아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의 권세를 증명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9:6~7).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의심하였는데, 예수님은 이들의 의심을 보시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셨습니다. 죄를 사함 받는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죄 사함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눈으로 구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도 피싱할 때 많은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많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저에게 전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풍병자가 일어나 걷는 것은 눈에 보이는 확연한 일입니다. 아무리 악한 귀신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권세를 무시하는 사람도, 중풍병자가 일어나 걷는 것을 보고 그것을 신기하게 여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의 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모든 것을 만드신 것처럼 말씀으로 모든 것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풍병을 한 번의 말씀으로 고치신 예수님을 볼 때, 그가 큰 권세를 가지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바꿀 권세가 있으며, 특히 한 사람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권세를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펼치십니다. 사람의 쪽에서는 이 모든 것이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준비하셨으되 그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도전하고 개척하는 사람이 주님 안에서 승리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권세를 좀 더 적극적으로 믿음으로, 주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좀 더 잘 분별하고 그 길을 따라 가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믿음으로 저의 삶의 방향을 잡아야겠습니다.
 

아멘 한마디 :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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