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Ephesians 5:9)

원천UBF 김성진.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모세는 스스로 히브리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장성하여 어른이 된 후에 히브리 사람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다가 어떤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분노했습니다.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는 그 애굽 사람을 쳐서 죽였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에 대한 목자의 마음이 있었지만 그 방법은 잘못되었습니다. 스스로도 양심에 떳떳하지 못했으므로 시체를 모래 속에 감추어야 했습니다.

  모세가 감추고 싶었던 범죄는 그 이튿날 바로 드러났습니다. 두 히브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모세가 말리자 잘못한 히브리 사람이 모세에게 따져 대답하기를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마도 죽이려느냐"(2:14) 하고 대답했습니다. 모세는 자기 범죄가 드러난 것을 알고는 바로의 낯을 피해 얼른 애굽 밖으로 도망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별로 권세 있는 왕자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노예 히브리인도 대들고 애굽 사람 하나 죽였다고 바로의 낯을 피해 다른 나라로 망명해야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모세가 자기 혈기대로 애굽 사람을 죽임으로써 히브리 사람을 돕고자 할 때 그 도움이 양들에게 영접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모세에게 이르기를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2:14) 하며 모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사람의 말이 맞습니다. 모세는 아직 다스리는 자가 아니요 재판관이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될 약속을 가지고 있다 해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 자기가 이루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악한 일로 인해 미디안으로 몰려난 것 같은 모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합니다.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정처 없이 머무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때에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이 우물에 와서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와서 여자들을 쫓아내려 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미디안 제사장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모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또 그의 딸 십보라와 모세가 결혼하도록 했습니다. 이로써 모세는 미디안 땅에서 거지가 되는 것이 아니고 가난하지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합당한 광야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훈련이 끝나면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2:14) 하는 히브리 사람의 질문에 정식으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 하고 말입니다.

  사람을 돕는데도 무작정 돕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모세가 당한 일은 운이 나빠서 자기 악행이 발각되어서 겪는 일이 아닙니다. 하필 히브리 사람으로 태어나 애굽의 왕자가 되어서도 권세가 없어서 도망다녀야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그 백성을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세우시기 위해 모세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훈련하신 것입니다.

  훈련되지 않은 마음으로 양들 섬기려 하니 어려움이 있습니다. 힘들게 하는 사람은 힘들어서 멀어지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영접되지 않는 사람도 센터에서는 영접해야 하니 스트레스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모임에서 인간적인 질서를 세우는 것보다 영적인 질서를 먼저 세우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훈련 되어서 양들을 이해하고 섬길 수 있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받는 고난은 그러한 훈련의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이 그냥 고생이 아니고 미래가 있는 훈련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받아야겠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593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히브리 갓난 아기 중에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이 떨어진 후에 히브리인 중의 레위인의 가족 중에서 아들이 생겼습니다. 바로의 명령에 의하면 이 아들을 죽여야 했으나 부부는 아들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겼다고 했습니다. 잘 생겼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처음 난 아기를 보면 잘 생겨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사람은 잘 생겼다는 의미를 신앙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자기 양심으로는 아기를 포기할 수 없었고 양심대로 행하여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양심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석 달을 숨겼으나 환경이 바뀌어 아기를 계속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기 울음 소리가 나날이 커졌는지 단속이 나날이 심해졌는지.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집 밖으로 빼내어서라도 살리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석 달의 시간이 주어진 것은 아기가 본문의 갈대 상자 여행을 견딜 수 있는 몸을 가질 수 있게 했습니다. 아기 어머니는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해 물이 새지 않게 하고는 아기를 담아서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어머니는 마음이 아파 돌아가고 아기의 누나는 어떻게 되는지 알려고 멀리 서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애굽의 공주가 나일 강 가를 산책하다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아기를 발견했습니다. 공주는 그가 히브리 아기인것을 알고도 아기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 살리고자 했습니다. 이 때 멀리서 바라보던 모세의 누나가 재빨리 다가가 담대하게 공주에게 제안하여 히브리 유모를 붙이자고 했습니다. 그 히브리 유모는 아기의 친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아기는 살아남아 왕자로 자라고 이름은 모세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겪은 어려움이 어렸을 때부터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위기마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살아남고 성장하고 예비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인종차별적이고 이기적인 정책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어머니가 그를 석 달이나 숨겼습니다. 갈대 상자는 삼개월 된 아기가 담겨 있기에는 너무 연약하고 불편하고 위험합니다. 모세가 갈대 상자 안에서 만 하루라도 있는다면 외부의 어떤 해를 받든지 아니면 스스로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누나가 계속해서왜 지켜보고 있을 만한 짧은 시간에 하나님이 애굽의 공주를 그 길로 보내시니 갈대상자로도 모세가 지킴 받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또 애굽의 공주가 히브리 사람이라고 아기를 무시하지 않고 불쌍히 여겨서 데리고 간 것도 하나님이 그 마음에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모세는 자기 친어머니의 보살핌 아래서 자랐으며 애굽 왕가의 교육을 받고 그 생활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왜 권세 있는 부잣집 애굽인의 집이 아니고 가난하고 약한 히브리 사람의 집에서 태어났는지, 왜 애굽 왕이 히브리 남자 아기를 다 죽이라고 한 시대에 태어났는지, 이런 것에 불평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더 유익한 일입니다.

  세상의 죄의 세력 앞에서, 어려운 환경 앞에서, 사람은 갈대 상자 안에 있는 아기와 같습니다. 석 달 된 아기와 같은 자신이 겨우 갈대 상자 정도의 보호를 받는 것을 보고 두려워할 때, 죄와 타협하고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 본모습이 되기 쉽습니다. 말씀과 기도 생활 약간이 갈대 상자와 같이 약해서 세상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겨우 굶지 않을 정도로만 주시는 물질은 너무 적어서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사명보다 당장 돈 버는 일을 어떻게 먼저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방패의 겉모습이 갈대 상자와 같은 것을 보고 두려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있으면 스러지지 않는가. 안심이 안 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기본적인 영적 생활은 스스로 하려고 하지 않고 센터에서 무슨 특별한 프로그램이라도 있어서 영적 생활을 도와주면 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다달이 나오는 장학금이 날짜를 어길 때마다 형편이 어려워지고 마음이 불안해지니 무슨 복권이라도 하나 터져야 든든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볼 때 갈대로 만든 상자라도 하나님이 도우시면 충분한 방패가 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고 모든 환경 가운데 찬송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움을 받는 데에는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갈대 상자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충분한 도움을 주시는 것을 생각하면 제가 감사하고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592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


  초대 교회는 식사를 할 때 성찬식을 겸하여 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교회원이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은 단순히 식사가 아니고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좋은 음식을 가져와 배불리 먹었고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잘 가져오지 못해 조금밖에 먹지 못했습니다. 이래서는 함께 식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 가까워짐이 없고 멀어졌습니다. 이것은 주의 몸과 피와 하나가 되는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배고프니까 먹자는 육신적인 생각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먹는 문제에 있어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보다 자기 몸이 말하는 것을 먼저 듣는 것은 합당한 일은 아닙니다. 또 같이 식사하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 많이 먹고자 한 것도 합당한 일은 아닙니다. 심지어 자기가 돈을 내고 산 음식을 자기가 먹어도 유익한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문제인 것 같은데 사도는 이것이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라고까지 책망합니다. 주의 몸과 피는 연합을 가르치는 것인데 이 은혜를 받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 하나가 서로 멀어지게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한 마음이 되어야 되는데 서로 찢어집니다. 작은 일 하나라도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아마 이것은 주로 이기적인 본성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말할 때 저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하지 남에게 좋은 말과 필요한 말을 생각하는 것은 항상 두번째가 됩니다. 그러면 저는 두번째까지 반드시 생각하고 말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사람과 멀어지게 되고 이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도 생각하고 예수님의 몸인 교회에 죄 짓지 않아야겠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590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바울은 제사 지내는 것은 제사 받는 대상과 자기를 연합하는 의식으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제사를 지내면서 제단 제물로 자기 죄를 사함 받는 것은 제단에 참여하는 것, 즉 함께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상징하였습니다. 성찬식은 예수님의 피와 살에 참여하는 것, 즉 예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받고 성육신의 은혜를 받아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방인의 제사가 상징하는 것은 제사 받는 귀신과 합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렇게 우상 숭배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자고 했습니다.

  제사에 관해서는 그런데 제물로 드려졌던 음식에 관해서는 바울은 관대한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모든 것이 가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모든 것이 유익하고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제물로 드려진 음식은 좀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육신으로 보면 먹어서는 안 될 것이고 완전히 자유를 얻은 영혼이 보기에는 먹어도 상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음식을 절대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 먹지 말라 하는 것은 과거 유대인들이나 하던 율법주의적 종교생활에서나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원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고기가 맛있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안 먹으면 굶어 죽으니까 먹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먹어야 합니다. 제물로 드려진 음식을 먹는 것이 복음 안에서 자유로운 성도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먹어야 합니다. 먹지 않는 것이 작은 부분에서도 절제하고 주의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삶을 보여준다면 먹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음식이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물을 필요가 없지만 만약 우연히라도 알게 되면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해서 양심에 따라 먹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것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식생활도 절제가 있어야 되고 순종이 있어야 되고 배려가 있어야 되고 목자의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영적인 것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많은 일들이 있는데 사실은 다 하나님께 드려진 일들입니다. 저는 학부 때에 제 학업이 별로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가 없다고 보고 대충 대충 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원에서는 학업 때문에 직접적으로 역사를 섬길 시간이 별로 없는 것을 보고 학업 또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되어야 신앙 생활이 정체되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중의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 외에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의 일들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쉬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쉬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잠깐 쉬라고 하신 명령에 순종해서 쉬어야 제대로 쉬는 것입니다. 제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충성된 제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588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구원 받은 사람들이었고 그 중에는 훌륭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고 해서 실수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항상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도 불신자와 똑같이 불신으로 인한 죄를 지을 수 있고 죄로 인해 불신의 행동과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는 옛 이스라엘의 예를 듭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애굽을 나왔습니다. 그들이 애굽의 물질주의와 다신주의와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홍해를 건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로 나오면서 애굽과 단절되었습니다. 이것은 세례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세례가 물 끼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에서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으나 홍해를 건넌 것 자체로 세상과 이별하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 이후 그들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배우는 삶이었습니다. 사도가 언급하는 신령한 음식은 하나님이 주신 만나입니다. 고기를 먹이기 위해 보내신 메추라기도 포함될 것이고 또 그 외에 이스라엘이 먹는 음식은 모두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신령한 물은 반석으로부터 난 물인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악한 의도로 하나님께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을 신령함으로 갚으셔서 반석으로부터 물을 내셨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우리가 반석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은혜를 받아서 이스라엘의 삶이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민족이 되지 못하고 상당수가 약속의 땅이 아닌 광야에서 종신을 맞이하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애굽에서 죽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죽으면 그 삶의 과정이 좀 달라보여도 결국이 같은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멸망을 받았습니까?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기 위해 산에 올라갔을 때 이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금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죄는 금 송아지를 만든 것보다 모세가 보이지 않자 하나님도 의심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처음부터 하나님 대신에 눈에 보이는 모세라든지 모세의 말을 우상시하다가 모세가 사라지다가 죄의 모습이 금 송아지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눈에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다가 멸망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음행하였습니다. 음행 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러다가 뱀에게 멸망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원망하다가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것을 볼 때에 신자 이스라엘을 보고 항상 완전하다고 생각할 수 없고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모습을 보고 경계하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언제나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상당히 많은 부분의 삶이 말씀의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0:12) 하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반석 위에 서라는 말씀을 들을 때 '아 말씀 참 멋있다. 반석 위에 서는 사람 되자' 하고 다짐하지만 반석보다 세상의 모래 위에 서기가 즐거울 때가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대로 속이기를 좋아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보다 우선할 수 있습니다. 성도간에 교제를 한다고 속이고 교회원과 세상의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주 안에서 굳게 서는 것이 아니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말씀 생활도 이제 좀 했고 넘어질 일 없다고 생각하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세상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이 쉽고 영적인 것보다 육신적인 것이 먼저 판단의 근거가 되기 쉬운데 모두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런 모습에서 본 받을 것이 없고 회개할 것은 많습니다. 제가 조심하는 사람이 되고 선 줄로 생각할 때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587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바울은 자유인이었습니다. 로마의 법으로도 그러했고 유대인의 법으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며 영적으로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 앞에서 독립적이기보다 이 사람 저 사람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고 자기 권리를 일부러 행사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가 이러한 일을 자처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입니다. 사람을 얻어서 바울 파나 바울 당을 만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려드렸습니다.

  복음 역사를 섬기는 데에는 여러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복음 진리는 변하지 않고 마음과 행동이 모두 동일한 것이 당연하지만 그 나타나는 모습 자체는 다를 수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법대로,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의 모습대로 바울이 나타난 것은 이와 같습니다. 바울은 말씀을 전할 때도 때로는 세상 질서에 빗대어서, 때로는 유대 율법의 조문에서 그 본질을 이끌어내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전했으나 그 메시지는 같도록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모습이 있는데 저는 한 사람이고 저의 모습은 하나이기 때문에 사람 섬기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와 맞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섬기기 힘듭니다. 세상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피할 수도 있고 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피할 수는 없고 참고 넘어간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와 맞지 않는 그 사람 한 사람을 얻어서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그 사람을 변화시키기에 앞서 자기가 변화되고자 투쟁했습니다. 자기의 복음 진리는 전혀 타협하지 않았으나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게 했습니다. 양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다른 만큼 저도 한 사람 한 사람 볼 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와 다르다고, 평범한 사람과 다르다고 그 사람을 영접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다 잘 섬길 수는 없지만 제가 해야 하는 만큼은 할 수 있도록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고집하면 이런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비복음적 생각이 남의 비복음적 생각과 충돌할 때 특히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에 필요 없는 부분에서는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양보하는 사람이 되고 낮아지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586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이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고


  본문은 바울이 양들을 위해 헌신한 자세를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질서 안에서 자유인이었습니다. 이것은 남의 노예요 인신매매 당하는 자가 아니고 법적으로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또 그는 사도였습니다. 초대 교회가 인정하고 예루살렘 혹은 각 곳으로 파송하여 교회를 돕고 전도하도록 인준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사람이었고 주의 역사를 섬겨 고린도 교회를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도 바울에 대한 비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물질적으로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상황을 보면 바울과 고린도 교회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자기와 상관 없는 곳으로 여기지 않고 돕고자 했기 때문에 일부 교인들 사이에서는 바울이 불필요한 간섭을 행하는 것으로 보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권리가 없어서 자기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도 먹고 마실 권리가 있고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무엇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를 많이 돕고 세웠으니 이제 바울의 사역을 좀 도와 달라고 말입니다. 군 복무를 하는 동안 필요한 비용을 지원받고, 심은 포도의 열매를 먹고, 기른 양 떼의 젖을 먹는 것처럼 세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동료들은 이 권리를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양들에게 받는 것 없이 복음을 주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9:12). 첫째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했습니다. 양들은 자기를 위해 쓰는 비용조차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어 합니다. 돈이 없어서도 그렇지만 마음이 약해서 그럴 때도 있습니다. 자기를 위한 수양회비 내는 것도 힘들어서 깎아주고 분납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센터에서 이것 저것 얻어가면서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목자를 도우라고 시키면 더 힘들어합니다. 자기가 받은 만큼 남에게 주라는 것인데도 감당할 수 없어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연약한 고린도 성도들에게 지원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자립과 지원은 물질에 달린 것은 아니고 기도의 무게와 도전 정신에 있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순회 전도자로 어려운 가운데에 있었지만 사도였기 때문에 자립하고 지원할 수 있었고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자기 생업이 있고 자기 땅에 살았어도 영혼이 연약하여 바울을 지원하기 힘들어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 않기로 하면서 연약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더욱 강하여지기만을 바랐습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9:13-15). 둘째로 바울은 세상에서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것을 생각했습니다. 성전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성전의 것을 먹습니다. 제단을 섬기는 사람들은 제단에 바쳐진 제물의 나중 것을 먹습니다. 복음 역사를 섬기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힘껏 도왔으니 고린도 교회와 나누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받아야 할 것을 받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희생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급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9:18). 받아야 할 것을 다 받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상이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과 상을 나누고자 했으면 사람의 상을 받았을 것이지만 고린도 교회를 도운 상을 하나님과 나누고자 했으므로 하나님께 받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주기는 주되 받지는 못하는 것이 목자의 삶의 일부인 것 같습니다. 저는 양이 없는데 양을 섬기는 자의 희생은 아마 그럴 것입니다. 시간을 주었어도 돌아오는 시간이 없고 물질을 손해봐도 돌아오는 물질이 없습니다. 양들을 세워도 양이 목자를 세워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가 목자 되고자 하는 것은 손해 보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까? 사람의 시각에서 분명히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 꼭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 자체를 상으로 볼 정도로 복음을 기뻐했습니다. 이 복음이 저에게 동일한 상급입니다. 또 복음을 위해 헌신한 헌신의 댓가를 세상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서 찾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585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사랑은 덕울 세우나니


  복음을 영접하면 천국에 들어가기에는 모든 것이 가하나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우상 제물에 대한 갈등이 드러납니다.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도 먹는 것이 허락은 되나 권장되지는 않습니다. 우상 제물을 먹는다고 구원에서 떨어지진 않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시대에 어떤 사람들은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으면 우상의 귀신이 자기 속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속에 우상 귀신이 들어오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어도 귀신이 들어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음식은 음식이요 아무 위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부정하다 하는 것은 사람과 관습과 율법의 조문이지 심판자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도 사실은 자유함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음식을 함부로 먹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만일 우상의 제물과 음식과 복음에 관한 영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자유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면 이것은 그 사람에게는 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에 대해서 아직 옛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서 우상의 제물은 피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보기에 같은 교회에 다니는 훌륭한 청년이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힘들어지고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유익뿐만 아니라 남에게 줄 영향력도 고려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 음식에 대한 바른 영적인 지식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먹어도 되는 것도 형제자매를 위해 피하는 사랑이 사람을 세웁니다.

  바울의 시대에는 우상 제물의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시대와 문화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여름 수양회 때에 많은 새내기들이 왔다가 그들 중 일부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수양회 중간에 수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저녁 때에 다시 오기로 하고 목자님이 그들을 태워주셨습니다. 그런데 수원에 도착하더니 그들이 다시 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운전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런 사람을 볼 때 참 화가 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결국 목자님은 양들을 태우고 수원으로 갔다가 빈 차로 강화도로 돌아왔습니다. 사람이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되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지식입니다. 세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나 영적으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으로 그를 가르치고자 하면 양을 세울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참고 다시 그를 예배와 말씀 공부에 초청하는 사랑이 그를 세웁니다.

  교회원이 술을 마시는 문제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대학원에서는 교회 다니면서 술 마시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이런 문제에 대해 좀 생각해보게 됩니다. 술을 마신다고 구원을 잃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술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 자유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사실은 자유가 아니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세상에서 손해보는 것이라는 생각에 대한 부자유입니다. 그리고 복음 안에서 자유롭다는 지식을 갖고 술을 마시지 않는 형제자매를 정죄하는 세상 사람들과 동류가 됩니다. 술을 마셔도 실족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도 있겠지만 술을 마시면 점점 많이 마시게 되고 영혼이 혼탁하여지고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막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누가 술을 마신다고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력은 악한 것이고 사랑과 거리가 멉니다.

  저는 학부 4학년이 되고 그 때가 학생의 마지막 때라고 생각하고 성경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성경 공부를 삶에 적용시키기 위해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이 많아서 머리만 커진 점도 있습니다. 지식은 많은데 사랑이 없는 것 같습니다. 판단은 하되 교정은 못하고, 남에 대해서만 아니라 자기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목자가 안 되면 혼자 멋대로 살아도 상관이 없는데 목자가 되려니 이러한 문제가 큰 문제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저의 언행이 형제자매에게 줄 영향을 생각하는 것보다 제가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배우고 이러한 본성을 부인해야 합니다. 머리만 커지지 않고 마음이 커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식보다 사랑을 얻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도 인내하고 잘 돕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584 관련글 쓰기
  1. ZMFLTMXKFXLSK
    2010/09/01 18:23 Delete Reply Permalink

    어머나;;(DJAJSK;;)

   Leave a comment!!

없는 자 같이 하여


  사도 바울은 계속 결혼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결혼은 전혀 해악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결혼 때문에 세상에서 받는 고난을 피하고 또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외형은 지나가는 것이고 남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내 있는 자들이 없는 자 같이 하라는 것은 남편으로서의 일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한 사람의 성도로서의 일을 먼저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슬픈 일과 기쁜 일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바라보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 물질보다 하나님 나라에 있는 상급을 생각해야 합니다. 결혼 때문에 마음이 갈라져 자기 배우자만 생각하다가 이것이 세상 염려로까지 발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결혼 이야기를 이어서 세상의 온갖 것에서 올 수 있는 세상적인 생각들을 다 경계합니다. 결혼하는 것보다 독신이 낫다는 이야기가 잘 이해되지 않는데, 한 가지 이해하는 길은 '결혼은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을 세상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꼭 해야 된다는 생각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결혼이 인생의 중대사이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과 결혼생활이 예수님을 배우는 과정이 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세상에 매이게 하는 올무가 될까 생각했습니다. 또 결혼보다 독신이 좋다는 자기 말도 사람들에게 올무가 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중대사도 주님 오시는 것보다 중대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중대사가 많습니다. 졸업도 해야 하고 군대도 가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취직도 해야 합니다. 제가 젊어서 중대한 일이 앞으로 또 많이 남았는데 그 중에 몇 가지는 실제적으로 부딪치고 있고 나머지는 막연한 일들이지만 염려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대 가는 문제나 졸업 논문 쓰는 문제 앞에서도 주님 기다리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결혼이나 취직보다 주님 제자가 되는 일이 우선입니다.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제 일보다 주의 일을 염려하는 것이 마지막 때를 사는 옳은 길입니다. 제가 세상 일보다 주를 섬기는 일을 우선하여 하고 세상 염려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염려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583 관련글 쓰기
  1. milim daniella
    2010/08/25 02:12 Delete Reply Permalink

    아멘 . 오늘 말씀 참 실제적이네요 ㅋㅋ 매일 이렇게 말씀을 실제로 받아야 하는데 ㅋㅋ

    1. Re: BlogIcon 믿음으로
      2010/08/25 13:21 Delete Permalink

      ㅋㅋ 매일 그게 잘 안 되죠

   Leave a comment!!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바울은 이어서 좀 더 정상적인 성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난잡한 음란한 생활이 옳지 못하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대답은 결혼은 소중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하는 것이 좋지만 저마다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남편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몸을 자기가 주장하지 말고 서로 각방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한 때에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 잠시 며칠 그렇게 할 수는 있으나 곧 다시 합해야 합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자기 같기를 원했습니다. 본문에서는 특별히 결혼 문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같이 결혼보다 하나님의 역사에 집중하여 헌신된 삶을 살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헌신의 모습이 독신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가정 교회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7:7)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결혼하기 전에는 독신으로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되, 결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 같으면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혼이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함부로 헤어지면 안 됩니다. 배우자가 자기의 신앙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이 없는 자와 결혼하여 전도하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이 비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가리키는 결혼이 아니고 오히려 정욕이 불타는 것에 가깝습니다. 본문은 신앙이 없을 때 결혼하였으나 나중에 한 쪽이 신앙이 생긴 경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배우자가 자기를 떠나지 않는다면 자기도 배우자를 떠나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모든 경우에 적용될 만한 일률적인 해답을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한 가지 붙들만한 근거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7:17). 각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다릅니다. 인도하시는 길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하고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을 빨리 하고 어떤 사람은 늦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기 전에 모든 환경에 갖춰진 가운데에서 결혼을 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 것도 없는 중에 결혼부터 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앙인의 공통점은 각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 문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당시 교회 생활에서 실제적으로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는 것이 유익한지 받지 않아도 전혀 상관이 없는지가 문제였습니다. 지금도 사람마다 여러 가지 선택의 문제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길을 주셨는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 동역자들 중 다른 사람들의 눈치라도 보면서 주님이 주신 길을 놓치지는 말아야 합니다. 저도 선택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군대는 어떻게? 그 이후의 장래는? 결혼은? 취직은? 생각이야 많이 할 수 있지만 답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알고 그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부르심을 받은 대로 하나님이 가리키는 길을 가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582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2 : 3 : 4 : 5 : ... 49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