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Ephesians 5:9)

원천UBF 김성진.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아브람은 86세에 이스마엘을 얻고 지금 99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나이가 많아서 자기는 소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가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큰 소망과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17:1,2).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17:4).

  이 말씀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모습과 그 소망이 어떠합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람의 지금 나이가 99세이지만 그에게 소망을 두시고 이루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완전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함을 사모하고 이를 향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언약을 두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이름이 창대한 복이 될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함입니다. 아브람이 잘나서가 아니고 아브람이 우연한 행운아라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언약대로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에게 언약 민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17:5).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17:15,16). 더불어서 언약 백성의 징표로 할례를 받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7:17,18).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보다 자기 나이와 아내의 나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많이 도우셨지만 그것도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가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과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조화입니다.

  자신의 상식에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판단될 때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를 판단하는 사람이 되고 한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곧 무기력해지고 옛 열정을 잃어버리고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이 식습니다. 세상적인 사람이 되고 조건과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옛 삶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다시 불신을 부르고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에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때라도 하나님은 언약을 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때는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듣고 웃을 정도로 믿음이 약해진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언약을 믿는 믿음을 다시 확실히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7:19).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바라보았으나 하나님은 이삭을 바라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약의 때를 자기 마음대로 13년을 당기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가정에 분란만 가져왔던 과거가 있습니다. 이스마엘에게도 많은 축복이 약속되었으나 그는 영원한 언약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이삭을 주시고 그 언약을 이삭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벗어난 사람의 노력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데에 아무런 좋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언약 밖에서 이루어진 일은 언약 밖의 일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상황과 조건을 생각하고 웃을 때에 하나님은 변함 없이 약속의 말씀을 주심으로 아브라함을 도우셨습니다. 이것은 답답한 것이 아닙니다. 고지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변함이 없기 때문에 들리는 말씀도 당연히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징표를 새롭게 하기 위해 말씀대로 자기와 이스마엘을 포함하여 집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본문을 통해 믿음이 약해질 때에도 변함 없는 언약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됩니다. 제가 믿음이 좋을 때도 있지만 안 좋을 때도 있습니다. 세상 근심과 염려가 있으면 자연히 불신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때에라도 하나님의 언약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저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도록 부르셨고 한 사람의 목자가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자기 인생의 작은 문제 앞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장래 방향과 관련해서든지 현재 상황에서든지 조건이 안 좋게 보이는 때라도 변함 없는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해서 동일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407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본문은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이후의 사람들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같기 때문에, 노아가 받은 축복도 모든 사람이 받은 축복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 이것은 하나님의 첫 사람에게 주신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범죄한 죄인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축복을 주고자 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만 감사하고 회개함으로 죄 씻음의 은혜를 더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들에게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피째 먹지는 못하게 하셨습니다. 피는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노아 이후의 사람들이 비록 가축을 식용으로 쓰더라도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이 율법으로 인해 우리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신 이로 부르는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율법의 형태는 때마다 바뀔 수 있고 그 조문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나, 여기에 흐르는 은혜와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아들들과 다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 언약 또한 모든 인류에게 동일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9:11). 노아 이후에도 인류는 언제나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수 심판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번의 심판이지만 모든 사람이 기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홍수 심판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의 심판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미워서 홍수를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심판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언약의 증표는 무지개입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9:13). 왜 하필 무지개입니까? 홍수 이전에는 비가 없었으므로 무지개가 없었기 때문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하필 무지개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의 증표를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겠다는 약속의 확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약속을 하시고 더 신실히 지키시는 것도 모자라서 다시 확인까지 하셨습니다.

  약속의 증표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얻은 아들 이삭도 약속의 증표입니다. 그의 아들 노총각 이삭에게는 아름다운 아내 리브가가 약속의 증표였을 것 같습니다. 모세가 든 놋뱀도 약속의 증표입니다. 성경 시대가 아니더라도 지금을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각자 받은 약속의 증표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마음에 새겨진 받은 증거가 많고, 실제적으로 훈련과 축복을 통해 얻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물질 문제를 날마다 헤쳐 나온 것이 증거가 되고, 학업을 감당하는 것이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성도가 인지해야 할 가장 큰 증표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예수님 스스로도 가장 큰 표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죄인이 죄 씻음을 받고 거룩한 부활의 육체를 입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최종적인 변화입니다. 받은 증표가 있으면 그 언약을 믿어야 합니다. 제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루고 언약을 믿고 날마다 확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362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본문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축복을 두시되 한 가지 조건을 다셨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축복에 불필요한 제한을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언약을 맺고자 하시는 소망의 결과입니다.

  에덴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습니다. 많은 나무 중에서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강이 에덴에서부터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어 많은 땅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사람이 에덴에서 명령받은 일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2:15). 사람은 처음부터 동산을 경작하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도 놀고 먹기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일 하는 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일 하기를 고통스럽게 여기게 하는 죄에 얽매여 있는 것이 힘든 일입니다. 불필요하게 많이 일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속하게 된 것이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감당하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교회의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센터의 일이 하나님이 주시는 일이 아니라 억지로 맡은 일이 될 때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역사 섬기기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해야지 습관적으로만 하면 안 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의 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루어진 일이면 거기서 나오는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이므로 충성되게 감당할 때에 합당한 상급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으로 벌인 일이면 허무한 결과만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일도 한 가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2:16,17).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먹지 말아야 하는 나무를 왜 동산 가운데에 심어 놓으셨을까요? 만약 이 나무가 없었다면 사람은 범죄하지 않았을 것 같지 않습니까? 건강에 조금 나쁠 수 있는 의약품도 어린이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두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먹으면 반드시 죽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동산 가운데에 두신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실수나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산 중앙에 나무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죄 짓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사람의 외적인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인형이나 장난감과 같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친구로 지으시고 교제할 만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주신 것도 이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타락하기 전의 상황을 기록하는 것이기 때문에 직접 적용은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성도의 언약의 관계성에 대한 귀한 교훈을 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다 죄인인데, 우리 마음에 죄를 좋아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가 잠을 싫어한다면 안일함에 빠지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먹는 것을 싫어한다면 식욕의 귀신에 사로잡히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지으신 것이 아니라면 잘못된 정욕의 종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자기 바깥에서 들어오는 유혹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TV에서 사람의 잘못된 본성을 자극하는 방송을 하지 않는다면, 굳이 TV를 피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디어를 통해 죄가 밀려들어온다고 보기 때문에 미디어 금식을 한다고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인으로서 죄를 좋게 여기는 마음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핑계 삼아 죄를 마음대로 지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돕지 않으셔서 내가 죄를 짓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을 구하는 마음으로 죄를 떠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나 다른 사람이 좋다고 여기는 일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게 여기시는 일이 무엇인지 묻고 그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더 아름다우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내 입에 꿀처럼 단 것을 알 때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351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압살롬은 다윗에 대하여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은 압살롬의 죄악과, 또 이에 대해 제대로 처신하지 못한 다윗의 죄외 허물과 이들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죄가 뒤섞여서 일어난 비극이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다윗 왕조라도 이렇게 처음 왕부터 난리가 많은 것을 볼 때 인간적인 것의 한계를 볼 수 있습니다. 한 편으로는 이런 다윗 왕조라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있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세상을 비교하여 하나니의 섭리가 세상의 원리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거의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 아히도벨은 전세를 읽고 압살롬에게 마지막 작전을 제안했습니다. 그의 작전대로 된다면, 오늘 밤에 만 이천 명의 정예 병사가 지친 다윗의 군사를 쳐서 다윗을 죽이고, 온 이스라엘이 압살롬의 휘하에 들어오게 될 것이었습니다. 압살롬과 이스라엘이 장로들도 다 이 작전을 최상의 작전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최고 지휘자로서 한 사람의 말만 듣고 결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후새를 불렀습니다. 이것은 압살롬이 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선택이었습니다.

  후새의 조언은 무엇이었습니까? 후새는 다윗과 그 군사들은 뛰어난 용사이기 때문에 전투로 이기기는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윗 왕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유격전에 유리한 어느 굴이나 어느 곳에 숨어 있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때에 함부로 일부 군사만 움직였다가 선봉에 꺾이면 압살롬의 명성에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후새는 압살롬에게 새로운 작전을 주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땅의 많은 사람들을 모아 다윗의 일행을 찾은 후에, 피해가 다소 클지라도 그들과 전면전을 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후새는 이 작전을 제안함으로써, 오늘 밤에 출병할 수도 있는 압살롬의 군사들을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섬기는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모든 일을 전했습니다. 이로써 다윗 왕이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은 후새의 작전이 받아들여지고 자기 작전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볼 때, 압살롬의 패배를 직감한 것 같습니다. 후새의 말대로 다윗은 전쟁 영웅이었고 그의 장군과 병사들은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오늘 밤 내로 지친 다윗을 잡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제 후새의 작전이 받아들여지고 다윗은 오늘 밤 위험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언젠가 다시 세력을 키워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할 것이었습니다. 영리한 아히도벨은 지금까지 압살롬을 도와 여기까지 왔으나, 이제는 결국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고향의 집에 돌아가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최고의 모사였지만 그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압살롬은 승리할 것 같았지만 잘못된 작전으로 인해 다윗을 놓아주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지만, 오늘 본문은 압살롬과 아히도벨이 실패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17:14). 하나님은 하늘의 보좌에서 말씀으로 압살롬의 길을 막으신 것입니다. 인간적인 작전과 자기 생각으로 많은 일을 계획하고 이룰 수 있을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가로막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히도벨의 지략이 비록 뛰어나나, 하나님이 말씀으로 가로막으시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떠합니까? 그는 비록 패배하여 쫓겨나고 숨어 있는 신세이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그와 함께함으로 인하여 오늘과 같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비록 죄가 많고 허물이 많아 왕좌에서 내려와 땅바닥을 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이 일을 통해 다시 다윗을 연단하시고 회복시키시려는 소망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언약의 편에 있는 자는 승리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대학원생으로써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 캠퍼스의 전도 사명도 감당해야 합니다. 연구실에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경쟁자들을 볼 때 마음이 불안합니다. 잘 나오지 않은 중간고사 성적을 볼 때, '내가 사명을 섬겨서 이런 걸까' 하며 불신의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 안에 있는 자가 승리를 얻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지금 잠깐 잘나가는 듯 보일 뿐입니다. 또 성도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는 일을 자기 소원을 따라 하거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자기 소원에 맞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면 축복의 자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언약 백성과 자녀의 지위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다른 것을 더 좋게 여기지 않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248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 언약을 반포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순종할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또 모세는 제사를 준비하게 하고 이를 하나님께 드리며 언약서를 낭독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또한 이를 모두 따를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더불어 공개적인 약속을 맺은 것입니다. 약속은 속으로만 맺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하는 신앙 생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끄러워 하며 숨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가 어렵습니다. 질그릇과 같은 자신에 담긴 보배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피를 가지고 와서 백성에게 뿌리며 "언약의 피"(24:8)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언약의 피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을 나타내는 피입니다. 언약의 피를 통하여서 사람이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언약의 피는 속죄를 위한 제물의 피입니다. 언약의 피는 단번에 드려지신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은 이 언약의 피 안에 자신들이 들어가 있음을 공표하고 있습니다. 언약식이나 피를 뿌리는 의식이 과거의 그 시대에 무슨 특별한 다른 문화적인 의미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사람의 약속이 맺어짐이 공표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약속이 드러나야 하는 것은,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스러울 만큼 보배로운 존재가 아니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보배와 같이 기쁘게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있음을 인정하고자 할 때, 가끔 어떤 주위 사람은 그리스도인을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 예수를 주로 인정하고 제자의 삶을 결단했음을 밝히면 '훈련'이라든지 '역사'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역할도 생기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피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사실은 우리에게 축복이 됩니다. 당장 자기 능력의 모자람을 알고 낙담할 때도 있지만, 이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기도를 더 배우게 됩니다.


제가 저의 마땅히 인정해야 할 것과 마땅히 주고 받아야 할 것들을 피하지 않고 감당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102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그 언약을 눈여겨 보소서
 

  시편의 많은 시들은 처음에는 자기 비참한 상황의 토로로 시작하여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끝납니다. 이 시도 또한 처음에는 이와 같은 토로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74:1). 화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며 하나님께 원망의 질문을 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하여서 화자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진노를 화자에게 보이시자 화자는 하나님이 예전부터 베푸셨던 구원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의 기업의 지파가 된 회중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시온 산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대적자들은 모두 주님의 손에 의하여 부서졌던 것을 알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앞으로도 구원의 주님이시며 심판의 주님이실 주님을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대적자들은 강성한 것 같아 보여서 모든 회당과 표적과 선지자들을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로부터 우리의 왕이십니다. 주님의 구원의 능력이 어떠합니까? 화자는 고백합니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주께서 바위를 쪼개어 큰 물을 내시며 주께서 늘 흐르는 강들을 마르게 하셨나이다"(74:13~15).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구원의 역사들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능력이 충분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을 만드신 이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74:16~17). 하나님은 이와 같이 능력이 많으십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시고 그 언약에 있어서는 신실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하나님의 대적자가 강성한 것 같아 보여도 결국에는 패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화자는 이 절박한 상황에서 처음에는 자기 처지를 비관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통하여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어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바라보면 안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안 되는 일들만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이 능력이 적고 쉽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보다 뛰어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제가 저를 바라보게 되면 완벽하지 못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내려 놓고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고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자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먼저 바라보아야겠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98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영원한 언약의 피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


  기자는 독자에게 인도자들의 말을 경청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믿음의 선진들의 예를 보았습니다. 일단 믿음의 선진이란, 아브라함의 가계를 비롯하여 그 이전의 노아나 에녹과 같은 사람들, 그 이후의 모세와 사사들과 다윗 왕과 선지자들과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들 외에도 우리에겐 흔히 '신앙 선배'라고 부르는, 우리보다 먼저 성경을 접하여 감동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들과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인도자들 중 가장 큰 인도자는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13:20)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직접 인도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정말 나에게 있는지 그것 또한 알기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길이 명확히 보이는 지도가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앞으로 몇년 후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습니다. 졸업은 하게 될지, 졸업하고 무슨 일을 할지, 어디서 살게 될지... 이것은 저에게는 명확한 지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나침반과 같은 것을 얻고자 기도합니다.

    목자의 이끌림을 받는 양은 자신의 갈 길이 어떤 길인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목자의 인도 하에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제 길을 모르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선한 목자 되시는 이의 인도가 저에게도 나침반 되는 줄은 압니다. 그래서 저는 비록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 수 없지만 믿음의 나침반을 의지하여 걸어가고자 합니다.


제가 선한 목자의 이끄심에 따라 사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53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예수님은 새 언약의 시작입니다. 히브리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새 언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

  옛 언약의 제사장들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8:5)를 섬깁니다. 모세의 때에 만들어진 성막은 하나님이 그대로 만들라고 보여주신 것을 토대로 만든 것으로, 그리스도의 모식도가 됩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언제나 등불이 꺼지지 않으며, 겉보다는 속이 더 아름다운 그 성막의 면면들이 그리스도와 닮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8:6)입니다. 이것을 레위 출신 제사장보다 "더 아름다운 직분"(8:6)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다리가 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중보라고 하여 남의 기도제목 대신 말해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 기도제목을 끌어안고 올라가기 위해, 죄를 끌어안고 내려가기 위해 오셨습니다.

  옛 언약은 도저히 인간으로서 지키기가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도 희미해졌던 적이 많습니다. 옛 언약에 흠이 있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에 흠집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굳이 언약의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의지를 만드시고 우리에게 단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 하시는 것을 영접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제 새 언약은 구약의 율법과 같이 잡다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 제사장은 양이나 소를 잡아 그 피로 무엇을 대속하지도 않으며, 땅에서 번제하지도 않습니다.

  새 언약의 제사장으로 세움받으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더이상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뛸 필요가 없습니다. 죄짐을 열심히 넘겨줘야 합니다. 새로운 언약은 이것만 잘하면 우리에게 구원이 있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것이 흠없는 약속이 되는 것은 심판의 날까지 유효한 언약임을 나타냅니다.
 

제가 유일한 새 언약 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두려움 없이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계속해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42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