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Ephesians 5:9)

원천UBF 김성진.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재확인하고 주권신앙이 내면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적 성격과 하나님의 축복과 같은 외면적인 것에만 기대던 신앙이 발전하여 하나님 한 분을 사랑하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말로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42:2). 뿐만 아니라 자기의 부족함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 자기의 뛰어남을 자랑하는 욥의 태도와 크게 달라졌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주님과의 관계성이 발전했습니다. 이전에는 귀로 듣기만 했으나 이제는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게 되자 욥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는 회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변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회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이만큼 성숙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욥을 야단치셨다고 해서 욥이 못난 사람이란 것은 아닙니다. 욥이 자기를 높이기보다 낮추기를 먼저 했을 때 하나님은 욥과 친구들 사이에 순서를 정하셨습니다. 엘리바스와 두 친구의 말이 욥의 말처럼 옳지 못한 것을 정하셨습니다. 자기 말의 옳고 그름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욥이 좀 교만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주장할 때에는 사람과 싸워야 했습니다. 옳은 말이라고 해서 자기 멋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이론적으로 맞는 말이 다 맞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태도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태도가 아니면 도덕적으로 옳은 말, 종교적으로 옳은 말이 결국 스스로를 정죄하는 말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회개할 때 하나님이 욥의 주장을 대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공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다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변화된 욥을 기쁘게 받으셨고 그에게 이전 소유의 갑절을 주셨고 말년에 더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욥이 이전에 재산을 잃은 것은 그가 가난 가운데에서 고생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고난 가운데에서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욥이 고난과 내적 투쟁과 또 다른 사람의 도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회개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자 이를 위한 수단이었던 고난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성도는 일생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삽니다. 그러나 일생 완전한 삶을 이루지는 못하기 때문에 늘 고난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고난이 있는데 남들이 보기에 어떻든 자기가 받아들이기에는 다 어려움이 있는 고난들입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전한 삶을 우리가 이룰 때 완전히 없어집니다. 부분적으로는 성장할 때마다 고난이 하나씩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성되기로는 제가 부활의 육체를 입는 약속의 날이 오면 고난이 완전히 없어집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이기 때문에 고난을 불평과 불만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기가 죄인이고 부족하기 때문에 고난이 필요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생기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501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본문에서 일단 나타나는 것은 리워야단의 모습입니다. 리워야단은 당시 사람이 무서워하던 괴물 같은 생물체였습니다. 그것이 전설 속의 생물인지 아니면 악어의 한 종류인지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공룡과 비슷한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볼 때 사람이 감히 대적하기 힘든 무서운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리워야단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큰 용맹, 늠름한 체구, 둥근 이틀, 즐비하고 튼튼한 비늘이 있습니다. 입에서는 횃불과 불꽃이 나옵니다. 진짜로 불이 나온다기보다는 불처럼 무서운 공격을 할 수 있다는 뜻 같습니다. 가슴은 돌처럼 튼튼합니다. 용사라도 리워야단과 싸울 수 없고 칼로도 창이나 투창이나 화살로도 해칠 수 없습니다. 쇠를 지푸라기 같이, 놋을 썩은 나무 같이 여기는 존재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잡았고 많은 목자가 양을 지킬 때 쓰는 물맷돌도 리워야단에게는 무섭지 않습니다. 리워야단이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흙 바닥을 도리깨로 친 것 같은 자국이 남습니다.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입니다.

  이러한 리워야단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대항할 수 있습니까? 낚시로 잡을 수 없습니다. 리워야단을 물고기 제압하듯 제압할 수 없습니다. 종으로 삼을 수 없고 새처럼 가지고 놀 수 없습니다. 애완동물 삼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리워야단을 보면 다시는 싸울 생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이야 총으로 쏘면 그만이겠지만 욥의 시대 사람들에게 리워야단은 공포의 대명사였을 것입니다. 아무도 리워야단을 능히 제압할 수 없고 목격하면 도망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나 리워야단이라 하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아닙니다. 리워야단조차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리워야단과 같은 피조물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해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안다면 두려워서 감히 덤비려는 생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따지고 대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조주이며 대적할 자 없는 하나님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일생 하나님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싸움을 안 받아 주셔서 망정이지 만약 하나님이 자신을 대적하시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모든 불신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씻김 받은 성도는 근본적으로는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지만 때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각과 말과 일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인생에서 빼놓고 인생을 설계할 때가 없습니까? 생명의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힘들어 죽겠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회개하고 주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500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나는 비천하오니


  본문에는 욥의 자기 고백이 들어가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결국 자신이 비천한 자임을 발견하였고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이 의미 없는 죄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하시는 말씀에서 트집을 잡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로운 것을 나타내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악하다 버리지 않으시고, 욥의 내면 깊숙이 있는 약간의 악함도 꺼내어 욥에게 알리시고 욥이 회개하도록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들은 욥은 말했습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40;4). 손으로 입을 가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말을 하기에는 자신의 입이 부끄러워 감추어야겠다는 뜻입니다. 동방의 의인 욥이라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죄악된 사람의 본성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말을 할 것이 없고 따질 수가 없는 것이 죄인의 실존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고 악인을 벌하되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의롭다 하여도 공의를 세울 수 없고 스스로도 의롭게 할 수 없는 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뛰어난 자라 하여도 하나님 앞에 서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므로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언제나 못하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는 늘 못하게 여기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자신이 비천한 것을 잊으면 욕심이 많아지고 남은 잘 되는데 자기는 왜 안 되냐며 따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여기에는 자신이 한 일이 반영된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결과인 것이 많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과거에는 신앙적 확신 가운데 선택했던 길이 오늘날에는 올무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천한 자신을 잊고 자기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인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의 길을 가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라도 자신이 이러한 것을 마땅히 겪어야 연단되는 죄인인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이 연단도 감사합니다. 분명히 이 길 끝에 큰 상급이 있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제가 모든 상황 가운데에서 저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비천한 사람을 인도하시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여겨야겠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499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네가 아느냐


  하나님은 욥에게 계속하여 비슷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 그것이 몇 달만에 만삭되는지, 이런 지식은 사실 얻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알지 못했습니다. 욥이 알지 못한 것은 사실 염소나 사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신 질서에 대한 자세한 지식이었습니다.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저는 제가 전공하는 경제학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많고 그 외에는 더 많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지식이 부족합니다. 많은 것을 알고 싶고 또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족한 자기 생각으로 채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믿음, 완전한 계획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498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누가 준 것이냐


  본문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자신과 욥을 비교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별자리를 정하시고 별을 운행하십니다. 별의 길을 아시고 그대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운행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번개도 순종하고 대답합니다. 심지어는 욥이 가지고 있는 지혜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이 아는 모든 것과 그가 모르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욥이 하나님과 논쟁하고자 한 기초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한 것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와서 욥을 정죄하자 그는 금방 불같이 화가 나 친구들과 말싸움을 벌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고 개인적인 묵상을 하기 이전에 친구들과 인간적인 선악논쟁을 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욥이 특별히 영적으로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그럴 것입니다. 연희센터에서 한 후배가 저에게 '목자님이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한 적이 있는데 저는 겉으로는 웃었으나 속으로 화가 많이 났습니다. '기도는 하루에 24시간 해도 부족한 것인데 기도가 부족하단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듣지 않으시거나 혹은 기도의 성취를 뒤로 미루신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 있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하나님께 가서 찾아야 합니다. 제가 사람의 인정이나 사람의 능력에서 모든 것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인도하심을 얻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497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드디어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욥의 친구들보다는 욥을, 욥보다는 엘리후를 더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 모든 자를 창조하신 분에게는 누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목적은 욥을 누구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욥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문제점을 말씀을 통해 해결하시고 욥을 성장시키시며 욥과 더 교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38:2) 욥은 슬기롭고 지혜가 많은 사람이며 친구들 세 명과 말로 싸워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무지한 말이었고 생각을 어둡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욥이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욥은 영적 지식이 많은 것 같았으나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욥은 시합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과 가지고 계신 지식 중 욥에게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무엇입니까?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개 까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38:3-6),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38:8),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으며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 주었느냐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38:25-29). 누가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반면 욥은 어떻습니까? 동방의 뛰어난 의인 욥을 관찰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보입니까?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38:12,13),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땅의 너비를 네가 측정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할지니라 어느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너는 그의 지경으로 그를 데려갈 수 있느냐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네가 아마도 알리라 네가 그 때에 태어났으니 너의 햇수가 많음이니라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38:16-22). 욥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가 나이 많고 경력이 길다고 해도 하나님의 경륜에 비할 바 아닙니다.

  무식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학교를 덜 다닌 사람입니까? 공부를 못 하는 사람입니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욥을 무식하다고 하시는 것은 욥이 가방끈이 짧거나 머리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무식한 사람은 하나님과 논쟁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사람 중에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논쟁하면 시합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식함만 깨닫고 물러날 뿐입니다. 물론 이 때에 회개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주로 영접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됩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자기의 무식함을 자랑하고 하나님과 싸우고자 하면 계속 무식한 사람으로 남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그 계획대로 운해하시는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발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기 때문에 나도 저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헌신을 못 하는 이유, 섬기는 자세를 못 가지는 이유, 세상으로 떠나야 되는 이유, 사명을 멈추어야 하는 이유가 다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하고 자신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러실 리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논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순종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논쟁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때라도 하나님께 정직하게 아뢰고 해결을 받아야지 자기 혼자 씩씩거리고 있으면 성장이 없습니다. 제가 저의 생각이 많아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논쟁보다 순종이 합당합니다. 제가 순종하는 자세를 가지고 저의 무식함을 버리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496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


  본문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엘리후가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엘리후는 뛰어난 영안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엘리후가 사람의 마음을 궤뚫어보는 능력이 있어서입니까? 엘리후가 하나님의 특별한 음성을 들었습니까? 이런 것들이 있다면 그것도 다 이유가 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엘리후가 평범해 보이는 것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것을 발견했습니까? 그가 자연을 볼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번개와 비와 폭풍우와 추위와 구름은 흔한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러한 것들을 볼 때 특별하게 여기지 않고 그때 그때 맞추어 살아가는 데에만 집중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이것들을 묵상해 보면 신기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람은 왜 불까요? 구름은 왜 모였다 흩어지며 비를 뿌립니까? 또 왜 구름이 없으면 비가 내리지 않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모든 자연 현상에도 의미를 두셨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에 따라 운행하도록 지으셨습니다. 엘리후는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죄악되고 분별력이 없어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합니다. 신실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저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자 하기보다는 그냥 무시하거나 당연시하거나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보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왜 하필 우산이 없는 날만 비가 오는지, 이것은 머피의 법칙이 아니라 아마도 하나님이 뭔가 알려주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했던 과목이 갑자기 잘 풀리고 반대의 일도 생기는지, 이것은 자기 노력과 성실과 계산만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과 주권에 의지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모든 일의 의미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이 꼭 좋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495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본문은 엘리후의 네 번째 연설입니다. 여기서 엘리후는 자기가 가진 영적 지식을 활용하여 욥을 돕도록 합니다. 그의 자세는 완전하지는 않으나 다른 사람을 위해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목자의 자세에 가깝습니다. 엘리후는 영적으로 실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욥에게 하나님을 향한 자세를 다시 잡도록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엘리후가 하나님에 대해 전한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않으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고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의인을 항상 지켜보시고 존귀하게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때로 의인이 고난 받을 때가 있습니다. 엘리후는 그 이유가 의인이라도 때로 악행과 교만한 행위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돌이키시기 위해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세상에서 아무리 의인이라도 죄를 범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욥의 다른 친구들보다 사람의 본질에 대한 파악이 정확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그가 때로 어려운 마음을 가진다고 해서 욥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죄를 더 많이 지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젠가 하나님의 때에 욥을 환난에서 이끌어 내시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시고 그의 상에 기름진 음식을 주실 것이었습니다.

  엘리후의 위로가 욥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위로가 됩니다. 세상에서 얻는 모든 부당해 보이는 고난과 고통들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것들을 갑절의 선한 것으로 갚으실 준비가 다 되어 있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죄 가운데 물든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천국의 집과 즐거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세상의 즐거움과 같은 뇌물을 따라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욥은 분노하기 쉬웠습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그의 아내의 말이 욥에게 큰 시험이 될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선한 뜻과 주권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 때 잘못하는 것은 사람의 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는 것은 저에게는 저의 지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으려면 제가 그의 행동을 이해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단계를 하나님께도 적용시키면 이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잘못하시는 것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잘못하시는 것을 용서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분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람과 같이 작게 여기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을 원하는데 자칫 이 관계성이 인간적인 관계성이 되면 이런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과 계획을 생각하면, 제가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제가 저의 합리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더 믿는 사람이 되어서 고난의 때에도 하나님께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494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본문의 엘리후는 욥에게 묻습니다.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35:2). 욥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한 채로 자기가 지혜로운 것처럼 말하는 것이 합당하냐는 질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물론이요 욥이 아무리 지혜로울 지라도 하나님을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욥과 친구들과 하나님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욥이 친구들보다 여러 면에서 뛰어난 것은 아마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욥이 의롭다 하나 자기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릴 것이 있습니까? 욥이 죄가 없다고 하나 그가 만약 죄를 많이 범했다 한들 하나님께서 그의 죄로 인해 손해를 보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행을 하고 악행을 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순전히 신앙적인 이유로 저의 행동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의 선행이 하나님께 실제적인 이득을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이 손해를 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저의 작은 믿음의 일을 그의 영광으로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것을 잊고 저의 일이 실제로 역사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평가하고 실망하거나 교만하여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받으시는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저의 멋대로 일을 하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제가 먼저 하나님의 방향을 알고 그가 정하신 길을 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454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엘리후는 욥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욥은 문제를 자기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문제를 하나님에게서 찾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질문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혹 자신에게만은 실수한 것이 아닌지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욥은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알 수 없는 주님의 주권 안에서 괴로워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럴 때에 자기 부족함과 지각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의 지식 얻기를 구해야 합니다.

  욥은 힘써 주님의 지식 얻기를 구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아직까지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문제를 말했습니다. 욥은 스스로 의롭다 함으로써 하나님을 죄의 영으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의 말을 많이 했습니다. 상황을 모르고 자신을 정죄하는 친구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기보다 자기를 변호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욥의 실수는 결국 하나님의 지혜에 기대지 않고 자기의 지혜를 의지한 데서 나왔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말을 듣고, 그가 비록 모든 사람보다 선할지라도, 여전히 악한 죄인임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엘리후 자신보다도 욥이 뛰어날지 모르나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그릇되게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렇지 못한 사람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피조물이고 또 죄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욥의 실패는 고난을 받은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의롭다는 교만에서 왔습니다.

  저는 때로 스스로 뛰어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정도는 좀 빼먹어도 남들보다 나을 것이라는 식의 생각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영보다 세상의 것에 가까이 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저는 언제나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경주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후퇴하는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회개하고 남과 상황을 보는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452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2 : 3 : 4 : 5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