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Ephesians 5:9)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경제학전공 석사과정 김성진.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요절은 소발의 정죄입니다. 그의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소발은 몇 가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가 잘못된 말을 한 것이 아니지만, 잘못된 때와 잘못된 대상을 두고 말하였습니다.

  나아마 사람 소발은 욥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자기들이 욥을 정죄한 말이 사실 자기에게 그대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듣자니 양심에도 찔렸을 법 합니다. 그러나 소발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책망하였습니다. 그의 전에 했던 부드러운 훈계와 달리 본문의 책망은 강한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소발은 욥을 심판 받을 자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정죄한 바리새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였습니다. 소발은 내면과 진리를 보고자 하지 않고 외모와 형편을 보았습니다.

  소발은 욥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그의 과거의 부와 명성과 행복을 판단하였습니다.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20:5). 소발은 욥이 잘나가던 시절을 그가 부당하게 축복을 누리던 시절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이 욥을 끌어내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발이 예측한 욥의 결국은 어떻습니까? 그는 망할 것이요, 독사의 독을 빨고 뱀의 혀에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비와 같이 쏟아질 것입니다. 철 병기를 피해도 놋화살에 맞을 것이고 그 촉이 쓸개에 꽃일 것입니다. 욥과 같은 악인이 받을 분깃은 오직 죽음과 두려움과 진노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발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가 악인의 끝에 대하여 맞는 말을 하였지만 때와 장소에 맞는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욥을 악인으로 정죄한 것이 그의 실수인 것입니다. 소발이 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로 말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말하는 것이 하기 쉬운 실수인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 한 두 개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기 쉬운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을 볼 때 겉 모습 한 두 개로 판단하고 '그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생각해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이 아닌데 사람을 일견에 다 알 수 없고 다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이 문제가 됩니다. 제가 사람을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이해하는 사람이 먼저 되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396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욥은 빌닷의 말을 들었습니다. 빌닷의 말을 들으니 그는 욥의 모습을 보고 전형적인 악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을 악인으로 정죄하는 빌닷을 향해서 자기를 변호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빌닷은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현세구복적인 신앙에만 매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이 의지한 능력자가 있었습니다.

  욥은 친구들의 말에 의해 자기 마음이 상했음을 확실히 말합니다.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19:2,3). 그런데 만약 친구들이 정말 선한 사람이라 욥이 정죄를 받는다면 그렇게까지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죄인들 사이에서 정죄를 받는 것이 욥을 더욱 비참하게 했습니다. 욥이 죄인이라면 모든 사람 역시 본질적으로 진노의 자녀인 것인데 친구들은 마치 욥이 특별한 죄인인 것처럼 취급했습니다.

  욥을 버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형제들, 욥을 아는 모든 사람들, 욥의 친척과 친지들, 또 욥의 식구들과 종들, 욥의 아내와 자녀들과 어린 아이들도 욥을 버리고 떠나고 조롱하였습니다. 욥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욥을 미워하며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 욥의 모습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욥은 이 상황에서 강한 척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심중에 있는 소원은 위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19:21).

  욥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자랑하신 의인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죄인이 맞습니다. 욥도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고, 또 위기 상황에서 자기 혼자 훌륭한 척, 센 척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의 위로를 받기 원했습니다. 이런 자세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물론 괜히 다른 사람의 짐이 되고 다른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 때, 자기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도 더 확실히 알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도움을 잘 주고 도움을 잘 받는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욥은 사람에게 위로를 얻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한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피차 위로를 하거나 위로를 얻기에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에 욥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19:25). 욥은 자기의 대속자가 살아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욥을 대속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자기가 친구들의 정죄대로 본질적으로는 죄인이나 이 죄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안에서 대속되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의해 정죄받을 것이 없으며, 인간적인 죄는 욥보다 친구들이 더 많을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 자체도 억울했지만 다시 대속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욥은 여기서 위로를 얻었습니다.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19:26).

  세상에서 위로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억울함을 누르고 홀로 분을 삭혀야 합니까? 그러다가 화병 걸립니다. 좋은 방법은 하나님께 나아가 토로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녀에게 위로를 주기 원하실 것입니다. 저에게 무슨 큰 억울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끔 불공평함을 겪는 게 아닌가 할 때는 있습니다. 남들보다 물질이 부족할 때, 남들보다 조건이 안 좋을 때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또 남들이 자신에 대해 오해할 때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제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마다 구원자와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395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악인


  수아 사람 빌닷은 친구들과 욥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욥의 토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사람 중에서 자기가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빌닷이 자기의 영적인 지식이 뛰어남을 자랑하는 부분입니다. 특별히 빌닷은 욥의 현재 모습을 통해 그가 악인임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닷은 욥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빌닷은 악인에 대해 어떻게 말합니까?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18:5), "그의 발 뒤꿈치는 덫에 치이고 그의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18:9),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라게 하고 그 뒤를 쫓아갈 것이며 그의 힘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 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18:11-13), "그는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 그가 거하던 곳에는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18:19). 이것은 악인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기도 하겠지만, 들으면 들을 수록 노골적으로 욥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빌닷은 욥의 모습이 악인의 결국인 것으로 볼 때 욥 또한 지독한 악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가 육신의 질병으로 나타납니까? 세상의 부유함으로 나타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판단하시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사도는 그 열매가 성령의 열매로써,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욥의 모습을 보니 그가 이 중에서 몇 가지를 이룬 것이 있습니다. 반면 빌닷을 비롯한 욥의 친구들은 욥보다 못해 보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 죄인이라 징계를 통해 하나님을 배우기도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 사람의 인생의 열매라고 해서 그의 내면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정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빌닷은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였습니다. 겉사람이 날로 낡아가도 속사람이 새롭게 되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면, 빌닷은 성도의 눈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신자에게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영향 받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그 사람 자체를 보기보다 그의 환경과 조건을 보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또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기보다 조건과 환경을 먼저 보기도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저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고 당연히 이래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면은 제가 극복하지 못한 인간적인 면입니다. 제가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해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394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욥은 자신을 위로하러 왔다는 친구들이 위로는 커녕 전혀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것을 목격하고 더욱 슬퍼졌습니다. 그는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었습니다. 아내도 욥을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멀리 있던 친구들마저 자기를 찾아와 비난하는 것을 들으니 마음이 무거워지고 슬퍼졌습니다.

  욥은 그들을 저주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삶이 힘듦을 한탄했습니다.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 지라도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17:14,15). 욥의 유일한 희망은 그저 죽는 것이었습니다. 죽으면 무덤에 누이고 구더기가 그의 살을 먹을 터이니 무덤과 구더기의 가족이 될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음만이 욥이 편안해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죽음도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에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희망을 잃어버리면 죽음을 선택한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죽는다고 해서 희망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욥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지만 거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욥은 삶에서도 희망을 얻지 못했고 죽음에서도 희망을 얻지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과거의 시도가 사실은 희망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삶을 좀 더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지만 희망은 주지 못합니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마음을 좀 더 기쁘게 만들어줄 것 같지만 희망은 주지 못합니다. 모두가 한계적이고 단점이 많은 부분적인 목표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희망을 발견할 수 없거나 한계적인 희망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디에서 희망을 얻습니까? 희망은 참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어야 영원한 산 소망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거듭나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393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본문은 욥의 대답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말을 듣고 위로를 얻지 못했습니다. 욥이 보기에 욥의 친구들은 재난을 주는 위로자였습니다. 욥은 자기가 당한 상황이 극심한 고난의 상황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권한이 있으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욥이 한 가지 의지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16:19). 욥은 고난을 해석하고 고난 중에 자신을 건지는 것이 친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누가 욥의 증인이 되십니까?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전에 사탄에게도 욥을 경건한 사람으로 부르셨고 욥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누가 욥을 위해 중보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용서와 중보를 하시기 때문에 죄로 인해 사람이 절망하기만 하면 안 됩니다. 사랑을 의지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욥은 고난도 고난이지만 친구들의 정죄를 받는 것이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예수님은 정죄받을 만한 일을 한 사람도 정죄하지 않으시는데, 친구들은 욥이 정죄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욥이 참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욥의 진심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어떤 일에든지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길도 아시고 진리도 아시고 진실도 아십니다. 저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제 마음의 선한 의도이든지 악한 의도이든지 알고 계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392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지혜로운 자가


  본문은 욥의 원망 섞인 탄식을 들은 엘리바스의 말입니다. 엘리바스는 지혜로운 자는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욥이 하는 말이 헛된 지식이며 욥은 지혜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먼저 자기들 중에 욥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다고 하며 인간적인 권위를 내세워 욥을 찍어눌렀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지식을 욥에게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이 악을 행하는 자들을 어떻게 하신다고 말합니까?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므로 그의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고 그가 평안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이르리니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칼날이 숨어서 기다리느니라"(15:20-22). 악인이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고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이것이 지금 이 땅에서의 삶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삶은 모형이고 우리가 진짜로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약속의 땅인 하나님 나라입니다. 악한 사람은 영원히 벌을 받을 것이고 포악자는 육신의 생명이 꺼진 후에는 다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또 엘리바스가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보존되지 못하고 그의 소유가 땅에서 증식되지 못할 것이라 어두운 곳을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의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으로 그가 불려가리라"(15:29,30). 경건한 자는 부자가 되고 악한 자는 가난뱅이가 될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일반적인 지혜와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맞습니까? 결론적으로 둘 다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부는 세상적인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훈련 중에 많은 것을 받았습니까? 그들은 그날 먹을 것만 받았을 뿐 바로 다음 날 쓸 것도 저축하지 않도록 강하게 훈련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굶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주신 부는 양식을 많이 축적하는 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을 깊이 신뢰하게 되는 부였습니다. 엘리바스가 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도우실 때 돈을 많이 주시는 것으로만 하신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것만 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는 스스로를 지혜 있다 하나 사실은 어리석은 자가 된 것과 같았습니다. 육신의 것으로 영의 세계를 볼 수 없는데 욥의 상황을 보고 욥의 영성을 정죄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는 욥 앞에서 지혜를 자랑하고 권위를 내세우나 실은 틀린 말만 하여 자기를 높이지도 못하고 욥을 돕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못했습니다.

  들은 말씀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겉으로만 아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말씀을 깊이 있게 알려는 소원은 없고 자기가 아는 것만 말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이단, 현세구복에만 그치는 신앙, 편협하고 고집만 세고 말 안 통하는 사람이 되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제가 성경책 조금 읽었다고 다 아는 척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알려주기 원하시는 지혜를 다 알기 전에는 다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해야 하고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지 남을 가르치려고만 하고 정죄하는 자세를 가지면 안 되겠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391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나이다


  본문은 욥이 세상의 삶에 대해 느낀 점을 말하는 장면입니다. 욥은 세상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었고 특별히 세상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로서 가지는 한계가 하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없이 사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참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욥이 깨달은 인생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통과 허무와 절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규례를 정하여 그 날 수를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사람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됩니다. 숨을 거두면 그의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삶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육신에 기초한 삶은 육신과 함께 멸망합니다.

  그런데 욥은 육신의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육신의 고통으로 끝나면 좋은데 욥은 친구들의 정죄와 더불어서 영적인 고통도 겪었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욥의 희망을 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친구들의 정죄와 같지는 않더라도,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 죄를 찾기 원하시면 얼마든지 찾으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재판정에서 무죄판결을 받기 원한다면 욥은 이대로는 실패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재판정에서 재판 받는 것은 우리의 죄목 뿐만이 아닙니다. 이 죄를 용서 받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더 중요합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용서 받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서 망하는 게 아니라 회개하지 않아서 망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욥이 육신의 것을 잃고 바라본 것이 하나님의 위로가 아니라 자기 죄악됨이라는 사실은 실망스럽습니다. 어떤 상황이 되든 자기를 바라보면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망한 자신을 바라보고 무슨 희망이 생깁니까? 그러나 승리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하고 승리자로 세우기 원하시는 것을 바라보면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390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본문은 욥의 현재 소원을 나타냅니다. 욥은 사람의 말을 듣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나오는 친구들의 말이 비록 겉으로는 옳은 것 같아보이나 욥을 도와줄 수는 없는 말이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지식은 물론 훌륭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진리에 비해서는 마치 전래동화와 같은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욥이 원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욥은 하나님께 고백하기를 원했습니다.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13:20,21).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벌하지 마시기를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벌을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겸손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욥이 고난을 통해 얻은 열매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13:22). 욥은 하나미과의 교제를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가 고난 중에 하나님께 버림받은 듯한 느낌이었으나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으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고난의 때에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의 공의에 따라 일하시기 때문에 자신에게 당한 모든 일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이 자기 행위의 결과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시험을 못 볼 때가 있고 착하게 살아도 악함으로 갚아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일을 통해 선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지 악함을 선함보다 높이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힘들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힘이 없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대학원생으로서 여러 가지 힘든 것이 있습니다. 돈을 벌 것이라는 당연한 집안의 기대를 뒤로하고 공부를 좀 더 하겠다고 나선 것도 부담입니다. 그러나 이 중에 부당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제가 이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389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본문은 소발의 정죄에 대한 욥의 대항입니다. 욥은 소발의 말이 틀렸음을 지적합니다. 소발과 친구들은 욥이 영적인 지혜가 부족하고 자기들이 욥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욥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욥이 보기에 그들은 욥의 고난을 통해 욥이 겪는 진실한 어려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욥이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의미를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의 역사 바깥으로 밀려난듯한 기분 때문이었습니다.

  욥이 본 하나님의 역사는 어떠합니까? 욥도 친구들이 말한 하나님의 역사를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인에게 복을 주시고 악인은 벌을 주시는 방법으로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률적인 규칙에 의해서 화복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강도의 장막이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가 평안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적어서 그들에게 적절한 권선징악을 하지 못하시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욥은 이것이 하나님이 그들의 손에 얼마나 주시는 지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모든 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과 바다의 고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들을 창조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가.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12:9,10). 그렇다면 사람의 일은 어떠합니까?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12:11-14).

  이후로 욥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시각과 다르게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은 공의를 뒤집는 분이십니까? 선악을 바꾸어 쓰시는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욥이 아는 하나님은 사람의 시각을 뛰어 넘어 더 큰 선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의 근시안적인 시각을 뒤집는 분이십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 뒤에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와닿지 않을 때 괴롭지 않습니까? 저의 당한 작은 고난도 의미를 몰라 괴로워하기 쉬운데 욥과 같은 큰 고난은 어떻겠습니까? 제가 고난 앞에서 인간적인 지식을 활용하여 하나님을 분석하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저의 상황을 영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388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요절은 소발의 정죄 제목입니다. 정말로 욥은 말이 많아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본문을 볼 때 소발의 영적인 지식이 제한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소발은 하나님께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었고 또 이것을 전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하게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소발이 듣기에 욥은 스스로를 정결하고 깨끗하다고 하는 교만한 사람 내지는 거짓말쟁이였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누가 깨끗하고 누가 정결하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자신이 하나님만큼 깨끗하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앞에서 그의 여러 번에 걸친 탄식에서 잘 드러납니다. 다만 그가 고통을 토로한 것은 자기가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드린 자신의 삶이 어째서 말년에 고난으로 채워졌는지 그것이 슬퍼서였습니다.

  그러나 소발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사람이 세상에서 죄 지은 만큼 세상에서 벌을 주시고 세상에서 선을 행한 만큼 세상에서 복을 주시는 그런 분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소발 만의 문제가 아니라 욥의 모든 친구들의 문제입니다. 아울러서 욥도 비슷한 문제점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이 조심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기준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선악의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벌을 주시고 축복을 주시는 것은 그 자체가 중요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이것을 통해서 가르치기 원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보기에 작은 상이라도 영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일 수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 작은 고난이라도 나에게는 큰 일깨우심일 수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큰 벌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소발이 실패한 것은 그의 작은 영적인 지식을 모든 세계에 적용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소발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은 하늘보다 높고 스올보다 깊고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측량하고 이 하나님을 함부로 설명하려 하겠습니까? 먼저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이 판단할 수 없다고 인정할 때야 비로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역사를 판단하는 마음이 잘 생기기 쉬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소발의 모습을 저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회개해야겠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URL : http://cras.tistory.com/trackback/387 관련글 쓰기
   Leave a comment!!